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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해서 하는 기도
본문내용

Sermons on Prayers James W. Knox 지음 / 이우진 옮김 제6장 반복해서 하는 기도 1. 우리는 기도에 대해 공부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반복하는 기도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계속 반복해서 같은 기도 제목을 놓고 기도해야 하는지 의문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오늘은 이러한 것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2. 마태복음 6장과 26장을 보겠습니다. 먼저 6장을 보겠습니다. “오직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교도들과 같이 헛된 반복의 말을 사용하지 말라. 그들은 자기들이 말을 많이 하여야 아버지께서 들으실 줄로 생각하느니라.”(마6:7) 3.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7에서 헛된 반복을 금지하셨습니다. 헛된 반복은 이교도들이나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교도들은 특정한 기도문을 열 번 외우는 것이 다섯 번 외우는 것보다 더 효과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같은 기도문을 백 번 외우는 것이 오십 번 외우는 것보다 더 응답 받을 확률을 높여 준다고 생각합니다. 4.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보면 단 한번이라도 헛된 말로 기도를 하면 그것은 헛된 기도라고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헛된 말로 이백 번을 기도해도 그것은 여전히 헛된 기도일 뿐입니다. 같은 내용을 여러 번 반복하는 게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헛된 말을 하는 것에 있습니다. 동일한 기도 제목을 놓고 수백 번 기도하는 게 문제가 아닙니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헛된 말을 계속 반복하는 게 문제입니다. 5. 이제 마태복음 26장을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 계신 장면이 나오는 본문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 너머에 가서 기도할 동안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시면서 비로소 슬퍼하시며 몹시 괴로워하시더라. 이에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혼이 심히 슬퍼 죽을 지경이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조금 멀리 가사 얼굴을 대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오 내 아버지여, 가능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는 제자들에게 오사 그들이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도대체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었느냐? 너희가 시험에 빠지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참으로 영은 원하되 육이 약하도다, 하시니라. 그분께서 다시 두 번째 나가사 기도하여 이르시되, 오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서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오셔서 보시니 그들이 다시 자더라. 이는 그들의 눈이 무거웠기 때문이더라. 또 그분께서 그들을 떠나 다시 나가사 세 번째 같은 말씀들로 기도하시고”(마 26:36-44) 6. 예수님께서는 기도할 때 헛된 반복을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6장에서 예수님께서는 같은 기도를 같은 말로 세 번이나 반복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도는 헛된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드리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그 어디에서도 기도를 반복해서 하는 것을 금지한 적이 없습니다. 헛된 말을 반복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진심으로 하는 기도라면 하루에 같은 기도를 백 번을 해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하는 기도가 아니라면 단 한번도 하지 마십시오. 반복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헛된 반복을 하는 게 문제입니다. 7. 만일 구원받지 않은 가족을 위해 그들이 구원받게 해 달라고 진심으로 하는 기도라면 십분 마다 한번씩 같은 내용을 기도해도 상관없습니다. 그러한 기도라면 하나님께 매달려 끊임없이 반복해서 구해도 전혀 상관없습니다. 반복해서 기도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아 놓는다면 몇 번을 반복하든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8. 기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구하는 것과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는 것이라면 말의 표현이 좀 부족하다고 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단순히 “하나님,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해 주십시오. 제발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해도 진심으로 그렇게 기도한다면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우리가 구하는 것이 바른 것이라면 낙심하지 말고 계속해서 구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7에서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말씀합니다. 9. 기도에 대한 본문 두 개를 더 찾아보겠습니다. 야고보서 5장과 열왕기상 18장을 보겠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사도 바울도 자신이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요청을 한 것을 보았습니다. 사도 바울도 낙담하거나 용기를 잃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형제들에게 자신이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도록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한 것입니다. 10. 먼저 야고보서 5장을 보겠습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같이 동일한 성정의 지배를 받은 사람이로되…”(약5:17) 엘리야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천사장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신적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그도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엘리야가 우리와 같은 동일한 성정의 지배를 받고 있는 사람이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정(passions)”이라는 것은 “시각을 통해 전달되는 느낌(feeling)”을 의미합니다. 엘리야가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제단을 사르며 자신의 기도가 응답되는 것을 봤을 때는 마음이 한없이 담대해 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사벨로부터 자신을 죽이겠다는 메시지를 받았을 때는 두려워하며 도망쳤고 숨어서 차라리 죽기를 바랬습니다. 11. 엘리야의 감정은 그가 보는 것으로 인해 좌우되었습니다. 오바댜가 왕궁에 거하며 타협하는 모습을 보였을 때에는 그를 책망했습니다. 엘리야는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처한 상황을 보게 되었을 때에는 낙심하여 자살을 생각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12. 엘리야의 생애를 공부하면 대부분 갈멜산에서 바알의 대언자들과의 대결과 회오리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간 것을 살펴봅니다. 그러나 그의 삶을 자세히 들여보다면 그도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간절히 기도하니…”(약5:17) 성경은 우리와 같은 사람인 엘리야가 기도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엘리야가 승리하는 장면을 보면 항상 그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가 낙심하고 실패할 때는 기도하는 장면이 나오지 않습니다. 13. 엘리야는 위대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자신을 주님께 내어드려 위대한 하나님을 위해 싸울 때에는 위대한 일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위해 싸우지 않을 때에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습니다. 14. 시몬 베드로는 물 위를 걸었습니다. 그는 기적을 행했습니다. 그가 복음을 선포했을 때 수천 명이 회심하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작은 소녀 앞에서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기도 했습니다. 오순절에 그는 다락방에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성령으로 충만하게 해 주셨고 그는 거리에서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베드로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위대하신 하나님을 신뢰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삶에 위대한 일이 일어나게 해 주셨습니다. 엘리야나 베드로는 모두 우리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육신이 아닌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서도 놀라운 일을 하실 것입니다. 15. 잠시 골로새서 3장을 보겠습니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인에게 매우 중요한 구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켜졌거든 위에 있는 그것들을 추구하라.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 계시느니라.”(골3:1) 여러분이 구원받았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일어난 것입니다. “위에 있는 것들에 너희의 애착을 두고 땅에 있는 것들에 두지 말라. 너희는 죽었고 너희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느니라.”(골3:2-3) 16. 열정[1](passion)이란 시각을 통해 전달되는 느낌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애착(affection)이란 외부와는 상관없이 자신의 내면에 있는 사랑입니다. 사람은 출장을 가서도 간음을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내에게 가지고 있는 것이 애착이 아니라 열정이었기 때문입니다.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을 향해 가지고 있는 마음이 애착이 아니라 단순한 열정이라면 언제든지 부정한 짓을 할 수 있습니다. 17. 성경은 위에 있는 것에 애착을 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애착을 두라는 것은 보이는 것에 흔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로 우리가 아내에게 애착을 둔다면 멀리 떨어져 있어도 함께 손잡고 있을 때와 동일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애착입니다. 18. 단순한 열정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열정으로 주님을 섬기려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에 와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설교를 들을 때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충만합니다. 그러나 예배가 끝나고 집에 돌아가서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맙니다. 열정의 대상이 하나님에서 스포츠와 TV 드라마로 옮겨가 버리고 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19. 그러나 하나님을 향해 애착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예배 시간뿐만 아니라 일상의 삶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삶을 통해 그것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을 향해 애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마음은 화요일 저녁이나 일요일 오전 11시나 동일합니다. 20. 모든 사람들은 열정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위에 있는 것에 애착을 두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전혀 느낄 수 없을 때에도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 같이 보이지 않을 때에도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모든 것이 엉망으로 돌아가는 것 같아도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기도가 응답 받는 것 같지 않아도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병원에서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불이 나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통사고를 당해도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우리가 위에 있는 것에 애착을 두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도 여전히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으며 전혀 요동하지 않게 됩니다. 21. 열정이 아닌 애착 위에 세운 가정이라야 지속 될 수 있습니다. 열정을 가지고는 결코 예수 그리스도와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열정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면 얼마 가지 않아 흥미를 잃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믿음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은 애착(affection)입니다. 22. 저는 예전에 아프리카에 있는 어떤 청년으로부터 편지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여러 명의 형제들과 함께 있는데 자신을 포함하여 모두 최근에 구원받았으며 저의 설교 테이프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에게는 영적인 목표가 있는데 그것은 앞으로 삼 년간 열심히 복음을 전해서 백만 명을 구원받게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23. 저는 그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들이 주위의 환경으로 인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잃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자신들이 목표했던 것을 이루지 못하면 이내 실망하고 열정이 모두 사라져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위에 있는 것에 애착을 두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위에 있는 것들은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은 변합니다. 우리가 처한 환경은 변합니다. 그러한 것을 바라보면 우리의 마음도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위에 있는 것에 애착을 둬야 합니다. 변하지 않는 것에 애착을 둬야 우리의 마음도 견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4. 다시 야고보서 5장으로 돌아와서 엘리야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겠습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같이 동일한 성정의 지배를 받은 사람이로되 비가 오지 않기를 그가 간절히 기도하니 삼 년 육 개월 동안이나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였고 그가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자기 열매를 내었느니라.”(약5:17-18) 25. 엘리야는 기도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가 기도하자 삼 년 육 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았고 다시 기도하자 비가 왔습니다. 물론 이것은 대환란에 대한 예언이기도 합니다. 대환난 때 엘리야가 돌아오면 이러한 일이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26. 엘리야는 죽은 아이가 다시 살아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의 기도에 응답하시기 위해 죽은 아이를 살려주셨습니다. 또한 엘리야는 하늘에서 불을 내려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정확히 그가 말한 대로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놀라운 일들을 겪고도 엘리야는 열정(passion)에 의해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일이 잘 되는 것을 보면 기뻐하고 잘 되지 못하는 것을 보면 낙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교훈을 주기 원하셨습니다. 그가 열정이 아닌 위에 있는 것에 대한 애착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셨습니다. 27. 야고보서는 엘리야의 행적을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지만 열왕기상에서는 좀 더 자세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엘리야가 아합에게 이르되, 왕은 올라가서 먹고 마시소서. 많은 빗소리가 있나이다, 하니”(왕상18:41) 28.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고 있다면 우리는 담대하게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구한다면 우리는 응답을 받으리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그가 비를 멈추어 달라고 기도하면 멈추어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비를 다시 내리게 해 달라고 기도할 때까지는 비를 내리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와 약속 위에 굳게 서서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29. 엘리야가 아합에게 한 모든 말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고 느끼지 못했고 아무런 증거도 없었지만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지해서 비가 올것이라는 사실을 말했던 것입니다. 계속해서 42절을 보겠습니다. “이에 아합이 먹고 마시러 올라가니라. 엘리야가 갈멜 산의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자기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자기 종에게 이르되, 이제 올라가서 바다 쪽을 바라보라, 하니 그가 올라가서 바라보고 이르되, 아무것도 없나이다, 하매 그가 이르되, 일곱 번 다시 가라, 하니”(42-43절) 30. 우리는 엘리야의 삶을 통해 큰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특히 엘리야가 기도하고 응답 받는 것을 통해 중요한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약속을 받았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에 근거해서 아합에게 담대하게 진리를 선포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는 믿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기도에 응답해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 31. 그러나 하나님의 응답은 없는 듯 했습니다. 엘리야는 아무것도 응답 받지 못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비를 구했지만 구름 한 점 없었습니다. 만일 이때도 엘리야가 열정으로만 사는 사람이었다면 그는 꿇었던 무릎을 다시 펴고 일어나 산을 내려와서 아합에게 사과하고 하나님을 떠나버렸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듣지 않으셨고 응답하지 않으셨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열정으로만 일했다면 거기서 모든 걸 멈췄을 것입니다. 32.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교회에 다니고 봉사도 하고 헌금도 하는데 왜 자신들의 기도가 응답 받지 못하는지 의아해 합니다. 왜 남편을 구원해 주지 않으시고 아내를 구원해 주지 않으시고 병을 고쳐주지 않으시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열정에만 의지하여 신앙생활을 한다면 곧 그만두고 말 것입니다. 33. 43절의 뒷부분을 주목해 보십시오. “일곱 번 다시 가라.”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십니까? 다시 무릎을 꿇고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헛된 반복을 하라는 게 아니라 진심을 담아 열심히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러한 기도가 효과적인 기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쏟아 부어야 합니다. 34. 엘리야의 종이 일곱 번째 가기 전에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을 것입니다. 두 번째 세 번째 갔을 때에는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엘리야는 거듭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께 호소했을 것입니다. 아마 이런 일이 서너 번 반복되었을 쯤에는 엘리야의 종은 이미 지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이제는 아무리 기도해봐야 비가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늘은 여전히 구름 한 점 없이 맑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여섯 번이나 간절하게 기도했지만 응답이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35. 만일 엘리야가 눈에 보이는 것이나 느낌으로만 주님을 섬겼다면 여섯 번이나 기도했지만 아무런 응답을 받지 못한 시점에서 매우 낙심했을 것입니다. 그는 확신을 거의 잃어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섯 번이나 엘리야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심으로 그의 열정과 느낌과 감정을 모두 사라지게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하늘에 있는 것들에 애착을 갖게 하셨습니다. 그가 여섯 번이나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면서도 아무런 응답을 받지 못했을 때 그는 점점 느낌과 감정을 신뢰하는 것으로부터 하늘에 애착을 갖는 것으로 바뀌었을 것입니다. 36.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에 의지해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눈물로 씨를 뿌리면 기쁨으로 거두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눈물을 씨를 뿌려도 아무것도 거두지 못하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섯 번이나 눈물로 씨를 뿌렸지만 매번 아무것도 거두지 못하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기도와 섬김과 생활에서 이러한 일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구했는데도 아무런 응답조차 없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구름 한 점 없고 바람도 없고 비도 없고 응답도 전혀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가 느낌이나 감정을 신뢰하지 말고 우리의 애착을 하늘에 두게 하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37. 엘리야는 주변 상황에 당황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의 애착은 하늘에 있었습니다. 자신의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로 인해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이루시리라고 믿었고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는 기도는 반드시 응답 받으리라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여섯 번이나 응답 받지 못했지만 일곱 번째 기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엘리야의 애착은 구름이나 바람이나 비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의 애착은 하나님께 있었고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약속을 지키시리라는 사실을 믿고 있었습니다. 38. 44절을 보겠습니다. “일곱 번째 이르러서는 그가 이르되, 보소서, 바다에서 사람의 손만 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나이다, 하매 그가 이르되, 올라가서 아합에게 말하기를, 비에 막히지 아니하도록 왕의 병거를 준비하고 내려가소서, 하라, 하니라.” 39.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의 대언자들을 물리쳤습니다. 아합의 생각에 엘리야는 하나님의 대언자였습니다. 엘리야는 아합에게 큰 비가 있으니 피하라고 경고했습니다. 만일 그가 처음 기도가 응답 받지 못했을 때 계속 기도하는 것을 멈췄다면 아무런 비도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아합도 엘리야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첫 번째 기도가 응답 받지 못했다고 해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악한 왕이라고 평가 받는 아합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40. 엘리야는 비가 올 때까지 기도했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간증이 모두 자신의 기도에 달렸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엘리야가 계속 반복해서 기도하지 않았다면 그는 아합에게 간증을 잃었을 것입니다. 41. “그 동안에 구름과 바람으로 인해 하늘이 캄캄해지고 큰 비가 내리므로 아합이 병거를 타고 예스르엘로 갔는데”(45절) 왜 큰 비가 내렸는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큰 비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왜 큰 비가 내렸는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믿고 열렬하게 기도하는 사람의 기도에 응답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아무런 응답이 없을 것 같고 아무런 가망이 보이지 않을 때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기도하는 사람에게 주님께서 응답해 주셨기 때문에 큰 비가 내린 것입니다. 엘리야는 주변 상황에 개의치 않고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에 거했습니다. 42. 동일한 기도를 일곱 번 반복한 것이 잘못이었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믿고 하는 기도라면 응답이 없는 것 같다고 해서 기도를 그만두는 것이 잘못하는 것입니다. 43. 우리는 구원받지 못한 우리 가족과 친구들과 이웃들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영적 성장을 위해 계속 반복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간증을 지킬 수 있게 해 달라고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아직 충분하게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교회가 주님을 바르게 섬길 수 있게 해 달라고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다른 곳에서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단지 기도하고 싶을 때만 기도하는 게 아니라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44. 성경은 “이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히11: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엘리야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는 하늘이 맑고 구름 한 점 없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큰 비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큰 비가 올 것을 믿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을만한 아무런 이유가 없을 때에도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45. 우리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훈련이 된 제자들이 필요합니다. 믿음을 가지고 끊임없이 간절하게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아무런 응답을 받지 못할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도 전혀 낙담하지 않고 믿음을 갖고 꾸준히 기도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46. 우리는 이 마을에서 지속적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전도지를 나눠주었고 거리에서 설교를 했고 방송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오랜 시간 지속했지만 구원받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도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도 변화 받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한없이 멀리 떨어져 계신 것처럼 보였습니다. 47.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싶다고 하며 찾아오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단순히 열정으로만 사역을 했다면 우리는 진작에 그만 두었을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러 나가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러 나가기 전에 먼저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들의 마음과 삶을 온전히 주님께 드렸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사역할 수 있었습니다. 열정으로만 신앙생활을 하려고 한다면 머지 않아 지쳐 쓰러지고 그만두게 될 것입니다. 오직 하늘에 애착을 두어야만 주위 상황에 흔들리지 않고 아무런 응답이 없는 것처럼 보여도 요동치 않고 주님을 섬기고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48. 우리에게 무엇을 필요한지 아십니까? 엘리야처럼 기도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비가 오든 오지 않든,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든 떨어지지 않든, 누가 방해하든 그렇지 않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마음이 있다면 주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도 실망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것입니다. 49. 우리가 느낌과 감정의 영역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힘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느낌과 감정이 아닌 하늘에 있는 것에 애착을 두고 확신 가운데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행하시겠다고 약속하셨는지 아시기 바랍니다. 50. 성경은 데살로니가전서 5:17에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혹시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것을 여섯 번이나 간절히 기도했는데 응답 받지 못한 분이 있습니까? 그것이 정말 성경에서 약속하신 것이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기도라면 계속 기도하십시오. 일곱 번째에는 응답해 주실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를 스무 번이나 했지만 응답 받지 못한 분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계속 기도하십시오. 스물 한번째는 응답해 주실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51. 이 세상에서는 모든 것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 그러한 일이 생기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나 분명 주님께서는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를 위해 우리의 생각과는 다른 어떤 일을 행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의 영적 성장을 위해 바로 응답해 주지 않으시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우리가 구하는 것이 바른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시각에서는 그 기도에 응답해 주지 않으시는 것이 더 좋은 경우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52.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것보다 응답해 주지 않으시는 것이 우리에게 더 유익하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지 않으실 것입니다. 지금 응답해 주시는 것보다 나중에 응답해 주시는 것이 우리에게 더 유익하다면 하나님께서는 나중에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열정의 끝은 낙심입니다. 그러나 하늘에 애착을 두는 사람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모두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이라는 사실을 믿고 안식합니다. 53.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늘에 계신 분께 애착을 두는 것입니다. 모든 남편은 아내에게 애착을 두어야 하고 모든 아내는 남편에게 애착을 두어야 하며 모든 자녀들은 부모에게 애착을 두어야 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애착을 두어야 합니다. [1] 우리말 성경에서는 이것이 “성정”이라고 번역되었습니다.-역주

금식에 관한 성경적 교리
본문내용

Sermons on Prayers James W. Knox 지음 / 이우진 옮김 제7장 금식에 관한 성경적 교리 1. 우리는 성경을 통해 기도가 무엇인지 공부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에 나온 모범적인 기도도 살펴보았습니다. 신약성경에 나온 그리스도인들의 기도는 항상 다른 사람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신약성경에 나온 기도 중 그 어느 것도 쇼핑 리스트를 외듯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없습니다. 기도는 주님 앞으로 나아와 다른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입니다. 2. 신약성경에 나온 기도 중 오직 단 한번만 자신을 위해 간구하는 기도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몸에 있는 육신의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세 번 주님께 간구했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는 응답 받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약성경에서 자신을 위해 간구한 유일한 기도였습니다. 다른 모든 기도는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복과 도움이 임하기를 간구하는 것이었습니다. 3. 우리는 지난 시간에 반복해서 하는 기도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는 기도라면 우리는 주님께 계속 해서 끊임없이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응답해 주지 않으시거나 더디게 응답해 주시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구해야 합니다. 4. 우리는 오늘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잘 연구하지 않는 교리에 대해 공부할 것입니다. 이 교리는 육신이 원하는 것과 정확히 반대쪽에 있기에 인기가 없는 교리 중 하나입니다. 오늘 우리는 금식에 관한 교리를 공부할 것입니다. 신구약성경 전체에 걸쳐 하나님께 기도응답을 받기 위해 금식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는 먼저 성경에 나온 기도에 관한 여섯 가지 명령을 살펴볼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금식해야 하는 열 가지 성경적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5.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자신을 육체가 아닌 성령님의 통제아래 두기 위해 투쟁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교리를 실행하느냐의 문제는 그 교리에 대한 말씀이 얼마나 성경에 많은가에 있지 않습니다. 문제는 바로 우리의 마음에 있습니다. 6. 성경에는 마약에 대한 직접적인 말씀은 없습니다. 성경에는 코카인이나 마리화나에 대한 말씀도 없습니다. 성경에는 담배나 니코틴에 대한 말씀도 없습니다. 이러한 것들에 대한 구체적인 말씀이 없다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이러한 것들이 아닌 성령님께 내어 드려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7. 절제에 대한 설교는 인기가 없습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통제 아래서 살아야 합니다. 육신의 만족을 위해 사는 것은 성령님의 통제를 벗어난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님의 통제를 벗어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음식의 지배아래 살아갑니다. 선교를 지원할 돈이 없을 때에도 자신들의 배를 채울 돈은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느냐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음식을 통제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것의 통제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8. 마태복음 9장을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신랑이 혼인 방 아이들과 함께 있을 동안에 그들이 애곡할 수 있겠느냐? 그러나 날들이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때에는 그들이 금식할 것이니라.”(마 9:15) 9. 성경에 의하면 신랑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다른 사람들은 다 금식을 하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왜 금식을 하지 않는지 질문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자신의 제자들이 금식을 할 이유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신랑이 없을 때에는 금식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신랑이신데 자신이 제자들을 떠나시면 제자들이 금식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하늘나라에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때로부터 다시 오실 때까지가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금식할 시기입니다. 10.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실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종교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의를 자랑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단 한번도 그들이 선하게 사는 것을 책망하신 적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책망하신 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의를 신뢰하는 점이었습니다. 11. 마태복음 23장도 보겠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바치되 율법의 더 중대한 문제인 판단의 공의와 긍휼과 믿음은 무시하였도다. 너희가 마땅히 이것들을 행하였어야 하거니와 다른 것도 행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 말아야 하느니라.”(마 23:23) 3절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너희에게 지키라고 명하는 모든 것은 지키고 행하되 그들의 행위대로 하지는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는 아니하며” 12 바리새인들은 자만심에 빠져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드리는 십일조와 종교적인 집회에 참석하는 것과 자주 금식하는 것을 자랑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는 것을 자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가르치는 것은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말만하고 행위는 없기 때문에 위선자들이었지만 그들의 말은 그대로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13. 마태복음 5장을 보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를 능가하지 아니하면 너희가 결코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 14. 우리는 오늘 바리새인들이 왜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지 못했는지에 대해 살펴보지는 않을 것입니다. 문제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한 말은 옳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가르친 것은 옳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잘못된 자들이었지만 바른 것을 가르쳤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모신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구원자로 모시지 않은 바리새인들보다 훨씬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15.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하늘로 올라가시면 제자들이 금식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지 않았던 바리새인들도 금식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은 더욱 열심히 금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6. 예수님만이 금식에 대해 가르치신 게 아닙니다. 금식은 초대 교회에서 실행하던 교리 중 하나였습니다. 사도행전 13장을 보겠습니다. “그들이 주를 섬기며 금식할 때에 성령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서 시킬 일을 위해 그들을 내게로 구별하라, 하시니 그들이 금식하며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한 뒤 그들을 보내니라.”(행 13:2-3) 초대 교회에서 실행하던 것 중 하나는 기도하며 금식하는 것이었습니다. 17.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의 사도였습니다. 그는 성도들에게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처럼 성도들은 자신을 따르라고 가르쳤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을 보겠습니다. 그는 여기서 자신의 삶의 경험을 나누고 있습니다. “또 지치고 아프고 여러 번 밤을 새우고 굶주리고 목마르고 여러 번 금식하고 추위를 당하고 헐벗었노라.”(고후 11:27) 18. 성령님께서는 여기서 바울이 굶주린 것과 금식한 것을 구분해 주고 계십니다. 바울은 음식을 먹고자 했지만 음식이 없어서 먹지 못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먹을 음식이 있었지만 먹지 않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할 때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께서 승천하시고 나면 자신의 제자들이 금식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초대 교회는 금식했습니다. 우리에게 본으로 주신 사도 바울도 여러 번 금식했습니다. 19. 한 가지 예를 더 보겠습니다. 성경은 금식이 건강한 혼인생활에 필요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7장을 보겠습니다. “너희는 서로를 속여 권리를 빼앗지 말라. 너희가 금식과 기도에 전념하기 위하여 동의를 구해 얼마 동안 그리하는 것은 예외이나 다시 함께하라. 이것은 너희가 참지 못함으로 인해 사탄이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전 7:5) 20.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신약성경의 가르침과 초대 교회의 본과 사도 바울의 본에 따르면 금식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필수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금식하는 방법을 자세히 알려주셨습니다. 금식은 항상 음식과 음료에 대한 자발적인 거절입니다. 저는 지금 금식을 하면 건강 더 좋아진다거나 다이어트에 좋다거나 하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성경적인 금식은 자발적으로 음식을 먹지 않고 음료를 마시지 않는 것입니다. 21.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금식은 육신의 욕망을 완전히 부인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은 무엇인가를 먹기 원합니다. 그런데 금식을 함으로 더 이상 육신을 섬기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명하는 것입니다. 금식은 육신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의미입니다. 육신은 무엇인가를 마시기 원합니다. 금식을 하므로 더 이상 육신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을 찾겠다는 것입니다. 22. 성경은 우리가 모두 육신적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자신은 육신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만일 여러분이 자신은 영적이라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의 육신에게 내일 아무것도 먹지 않을 것이라고 말해 보십시오. 아마 한 달간 굶은 사람처럼 음식을 찾게 될 것입니다. 하루 종일 아무런 음료도 마시지 않으면 며칠 동안 사막을 헤맨 사람처럼 음료를 구하게 될 것입니다. 아마 냉장고가 자신에게 말하는 것처럼 환청이 들릴 것입니다. 23. 저는 “금식을 통해 건강해 지는 법” 혹은 “금식을 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같은 책을 도서관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이러한 책들은 모두 넌센스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육신은 음식을 원합니다. 금식은 건강을 위해 하는 것도 아니고 기분전환이나 다이어트를 위해 하는 게 아닙니다. 금식은 오직 하나님만을 찾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24. 사람들은 바빠서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합니다. 너무 바빠서 주님을 찾을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바쁜 사람도 식사는 합니다. 바빠서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하면서도 시장에 가서 식료품을 구입하고 요리를 합니다. 아무리 바쁜 사람도 식당에 가서 주문을 하고 식사를 합니다. 바빠서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하지만 육신을 섬기는 데는 시간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육신을 섬기는 것을 잠시 멈추면(금식하면) 하나님을 찾을 시간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습니다. 25. 금식을 하므로 얻게 된 시간(식사 시간)에 하나님을 찾을 수 있고 금식을 하므로 얻은 물질로 선교사역을 도울 수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의무적으로 그렇게 하라고 말씀 드리는 게 아닙니다. 우리 교회는 명단을 만들어서 금식 지원자를 받지도 않습니다. 신약성경에 나온 그리스도인들의 실행은 자신을 부인했다는 것입니다. 음식물을 섭취하는 것은 생존에 필요한 일이지만 그것을 멈추고 그 시간에 하나님을 찾는 일을 했던 것입니다. 26. 단순히 음식물을 섭취하지 않고 음료를 마시지 않는 게 아니라 금식하는 사람의 마음이 주님을 향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6장을 보겠습니다. “또한 너희는 금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자기들의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들의 보상을 받았느니라. 오직 너는 금식할 때에 네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네 얼굴을 씻으라. 그리하여 네가 금식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이지 말고 은밀한 가운데 계시는 네 아버지께 보이라. 그리하면 은밀한 가운데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네게 드러나게 갚아 주시리라.”(마 6:16-18) 27. 하나님을 찾으려고 금식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금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가 금식한다는 것을 광고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의 수준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영적인 체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습니다. 그래서 금식을 할 때도 평소와 다름없이 세수를 하고 몸을 단장하는 것입니다. 금식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영적이라고 드러내기 위해 하는 게 아니라 육신을 위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향하기 위해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8. 이제 이사야 58장을 보겠습니다.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금식하였으되 어찌하여 주께서 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가 우리 혼을 괴롭게 하였으되 어찌하여 주께서 알아주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는도다. 보라, 너희의 금식하는 날에 너희가 쾌락을 찾으며 너희를 위하여 모든 수고를 강요하는도다. 보라, 너희가 금식함은 다툼과 논쟁을 위함이요, 사악한 주먹으로 치기 위함이니 너희는 너희 목소리가 높은 곳에서 들리게 하려고 이 날에 하는 것 같이 금식하지 말지니라. 그것이 내가 택한 그런 금식이냐? 그것이 사람이 자기 혼을 괴롭게 하는 날이냐? 그것이 갈대같이 자기 머리를 숙이고 자기 밑에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이냐? 너는 이것을 금식이라 하며 주께서 받으시는 날이라 하겠느냐? 내가 택한 금식은 이것이 아니냐? 곧 사악함의 결박을 풀어 주고 무거운 짐을 벗겨 주며 학대당한 자를 놓아주어 자유로이 가게 함으로 너희가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냐? 또 그것은 주린 자들에게 네 빵을 나누어 주며 내쫓긴 가난한 자들을 네가 네 집에 들이는 것이 아니냐? 또 네가 벌거벗은 자를 볼 때에 그에게 입히며 또 네가 네 살붙이를 피하여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냐?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같이 터져 나오고 네 건강이 신속히 솟구치며 네 의가 네 앞에서 가고 주의 영광이 네 후위대가 되리니 그때에 네가 부르면 주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으면 그가 이르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만일 네가 네 한가운데서 멍에와 손가락질하는 것과 헛되이 말하는 것을 없애고 네 혼을 이끌어 굶주린 자를 향하게 하며 고난당하는 혼을 만족시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올라 네 어둠이 대낮같이 되리라.”(사 58:3-10) 29. 우리는 믿는 사람들에게 침례를 줍니다. 만일 누군가 침례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한다면 그는 헛수고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의롭게 될 수 있습니다. 침례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얼마나 놀라운 일을 해 주셨는지에 대한 간증일 뿐입니다. 30. 금식도 이와 같습니다. 금식을 통해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되려고 한다면 그것은 마귀에게 속은 것입니다. 그러나 의로운 삶을 살고 금식을 한다면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금식을 한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는 게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은 금식을 통해 의로워지려고 했다가 주님께 책망만 들었습니다. 회당에서 모이고 헌금을 드리고 금식을 했지만 그들의 마음은 여전히 악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지 않았습니다. 31. 주님께서는 그러한 금식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관심을 두시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살며 온 마음과 힘과 생각을 다하여 주님께 나아오는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그럴듯한 종교적인 행위를 한다해도 하나님 앞에서 마음이 바르지 않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따라서 먼저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행하고 나서 금식을 해야 주님께서 기도에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금식은 쇼가 아닙니다. 금식하는 사람의 마음이 어떠한지가 중요합니다. 바른 마음을 갖는 게 중요합니다. 32. 이제 금식을 해야 하는 10가지 성경적 이유를 빠르게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시편 35편을 보겠습니다. “나로 말하건대 그들이 병들었을 때에 내가 굵은 베로 내 옷을 삼고 금식하며 내 혼을 겸허히 낮추었더니 내 기도가 바로 내 품에 돌아왔나이다.”(시 35:13) 33. 시편 기자는 금식을 하며 자신의 혼을 겸허히 낮추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자만심의 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마음 깊은 곳에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이 제일이라는 의식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인생은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본성입니다. 34. 그러나 잠시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우주를 주관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아닙니다. 죽은 동물과 채소 쪼가리를 입 속에 넣지 않으면 살아있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식료품점에 가서 캔 속에 들어있는 것이나 라면 봉지 안에 있는 것이라도 입 속으로 넣지 않으면 결국 죽어버리는 존재일 뿐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겸손해야 하는 충분한 이유가 됩니다. 35. 자신이 능력 있고 강한 존재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착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침에 하나님께서 깨워주지 않으신다면 영원한 잠을 자는 게 인간입니다. 몇 일만 식사를 걸러도 모든 기력을 상실하는 게 인간입니다. 금식하며 자신의 혼을 겸허히 낮추었다는 것은 자신의 본연의 위치를 찾았다는 것입니다. 36. 시편 69편을 보겠습니다. “내가 울며 금식으로 내 혼을 징계할 때에 그것이 내게 모욕거리가 되었고”(시 69:10) 37. 금식을 하는 성경적 둘째 이유는 금식이 혼을 징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심에 감사 드립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들을 자백하면 그분께서는 신실하시고 의로우사 우리의 죄들을 용서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느니라.”(요일 1:9) 38. 문제는 우리가 죄를 짓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한 후에도 동일한 죄를 다시 범한다는 것입니다. 동일한 죄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그저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기 보다는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자신을 부인하는 게 필요합니다. 금식은 더 이상 육신을 만족시키며 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금식을 통해 자신의 혼을 스스로 판단하며 징계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같은 죄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스스로에게 내리는 징계인 것입니다. 아이들이 잘못을 했을 때 부모는 반성하라는 의미에서 식사를 주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금식도 바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배에서 빨리 음식을 넣으라고 하지만 그것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육신이 원하는 것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을 추구하겠다는 것입니다. 39. 금식은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식사대신 금식을 한다면 우리는 열렬히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배가 고플 때마다 식사 대신 금식을 하면 우리의 기도생활은 풍성해 질 것입니다. 우리는 식사하는 것은 잊지 않으면서 기도하는 것을 잊고 살 때가 있습니다. 금식은 식사 대신 기도하는 것입니다. 위에서 신호를 보낼 때마다 식사를 하지 않고 기도를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충분한 교제를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뇌에서 밥을 먹으라는 신호를 보낼 때마다, “나는 오늘 식사를 하지 않겠다. 왜냐하면 내 혼이 주님께 반역하여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내 마음이 주님 앞에서 온전해 질 때까지 육신의 필요를 채우지 않겠다.”라고 하는 게 바로 금식입니다. 40. 우리는 죄를 짓기 원치 않는다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바르고 깨끗한 삶을 살기 원한다고 합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우리가 죄를 지을 때에는 실제적인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시편 기자는 자신이 죄를 지으면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스스로를 판단하며 징계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주님 앞에서 자신을 부인했던 것입니다. 금식은 혼을 징계하는 것입니다. 41. 금식은 혼을 겸손하게 하는 것이며 징계하는 것입니다. 육신은 문제를 일으킵니다. 육신은 죄를 짓는 데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합니다. 이제 시편 109편을 보겠습니다. “내 무릎은 금식으로 인해 쇠약하며 내 살은 기름기가 없나이다.”(시 109:24) 42. 금식은 여러분의 육신을 약하게 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원수는 누구인지 아십니까? 바로 여러분의 육신입니다. 육신을 이기는 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육신에게 먹이를 주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육신이 계속 승리를 거둔다면 육신에게 더 이상 군량미를 공급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금식은 육신의 힘을 약화시키는 것입니다. 43. 욥기 23장을 보겠습니다. “내가 그분의 입술의 명령에서 돌이키지 아니하고 내게 필요한 음식보다 그분의 입의 말씀들을 더 귀히 여겼도다.”(욥 23:12) 저는 이 구절을 붙여놓기에 가장 적당한 곳은 냉장고라고 생각합니다. 제 아내는 이 구절을 냉장고에 붙여놨습니다. 44.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에게 필요한 음식보다 더 귀하게 여겼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주님의 말씀을 간식보다 더 귀하게 여겼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과자보다 더 귀하게 여겼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디저트보다 더 귀하게 여겼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필요한 음식보다 더 귀하게 여겼다고 했습니다. 필요한 음식이라는 것은 생존에 필요한 음식이라는 것입니다. 45. 제가 만일 여러분에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분은 손을 들어 보라.”고 한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요? 아마 대부분 손을 들 것입니다. 우리는 음식을 먹는데 하루에 세 시간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는 데는 몇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까? 46. 욥은 필요한 음식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귀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한 시간 동안 뷔페에서 식사하는 것과 한 시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 중 선택하라고 하면 지체 없이 성경을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금식을 통해 무엇을 알 수 있는지 아십니까? 금식을 통해 여러분이 무엇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지 드러나게 됩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영에 속한 사람을 먹이기 보다는 육신에 속한 사람을 먹이는데 더 큰 관심을 보이는 게 현실입니다. 자신이 음식과 하나님의 말씀 중 어느 것을 더 사랑하는지 궁금한 사람들은 금식을 해 보면 그 답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47. 전도서는 해 아래의 삶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을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전도서 6장을 보겠습니다. “사람의 모든 수고는 그의 입을 위한 것이나 식욕은 채울 수 없느니라.”(전 6:7) 48. 사람이 일하는 이유는 먹고 살기 위해서입니다. 한달 동안 열심히 일한 이유가 입에 음식물을 채우기 위해서 라는 것입니다. 만일 일하지 않고도 먹고 살수 있다면 아무도 일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은 사람의 모든 수고는 그의 입을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인생이 끝났을 때 우리가 단지 입을 위해서만 산 것은 아니라는 게 드러난다는 사실이 큰 복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49. 우리는 단지 먹기 위해 사는 게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그것보다 더 크고 본질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단지 먹기 위해 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추구하기 위해 식사를 거를 수도 있습니다. 일주일에 한번씩 식사를 하지 않고 그 돈을 선교사역에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우리가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서게 되었을 때 주님께로부터 “너는 입을 위해서만 살지는 않았구나. 너는 음식보다 더 고귀한 것을 위해 살았구나” 라는 말을 들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입을 위해 삽니다. 그러나 저는 더 소중한 것을 위해 살기 원합니다. 50. 다시 이사야 58장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내가 택한 금식은 이것이 아니냐? 곧 사악함의 결박을 풀어 주고 무거운 짐을 벗겨 주며 학대당한 자를 놓아주어 자유로이 가게 함으로 너희가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냐?”(사 58:6) 51. 금식을 하는 여섯 째 성경적 이유는 죄를 그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금식을 하는 이유는 사악함의 결박을 풀고 죄를 그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식욕을 이겨낼 수 있다면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생존에 필요한 음식을 거부하므로 육신을 부인할 수 있다면 다른 모든 점에 있어서도 육신을 부인할 수 있습니다. 52. “또 그것은 주린 자들에게 네 빵을 나누어 주며 내쫓긴 가난한 자들을 네가 네 집에 들이는 것이 아니냐? 또 네가 벌거벗은 자를 볼 때에 그에게 입히며 또 네가 네 살붙이를 피하여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냐?”(7절) 금식을 통해 여러분은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금식을 하면 여러분이 소유하고 있는 것을 가지고 있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는 계기를 가질 수 있습니다. 53. 제3 세계에는 굶주리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수없이 많은 날을 굶주리다가 하늘나라에 가는 구원받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왜 그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지 아십니까? 우리는 그들처럼 굶주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겪는 고통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뉴스를 통해 굶주리는 사람들의 소식을 듣고 안타까워하기는 하지만 그게 다일 뿐입니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이나 고통 받는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습니다. 우리는 먹고 살기 바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기독교입니다. 54. 금식을 하므로 굶주리고 고난 받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제때 식사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의 냉장고에 먹을 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외식하고 싶을 때마다 외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굶주리고 있고 내일도 역시 아무것도 먹지 못하게 될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금식을 하므로 그들에 대해 생각하고 그들의 고통을 알게 될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55. 이제 신약성경에서 나머지 세 구절을 찾아보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마태복음 17장을 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종류는 기도와 금식을 통하지 않고는 나가지 아니하느니라, 하시니라.”(마 17:21) 56. 이 구절은 금식을 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에 대해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기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전쟁에서 패배했을 때 금식과 기도를 하고 나가 승리하는 것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만이라는 악한 사람에 의해 멸망 당하려 할 때도 에스더와 모르드개가 금식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므로 백성이 구출되고 원수를 물리쳤습니다. 니느웨가 멸망하리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 느니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구하며 금식하고 기도하자 하나님께서는 그 도시를 벌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떤 사람에게서 마귀를 쫓아내려 했을 때, 주님께서는 기도와 금식이 아니고서는 그들이 마귀들을 쫓아낼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57. 우리는 어떤 문제를 놓고 간절히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한 가지 기도 제목을 놓고 오랜 세월 계속 기도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기도했는데도 아무런 응답을 받지 못하면 실망하고 낙심합니다. 저는 그런 사람들에게 그 문제를 놓고 금식하며 기도했는지 묻고 싶습니다. 계속해서 동일한 죄를 반복해서 짓고 괴로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그에게 금식하며 기도했는지 묻고 싶습니다. 계속 기도하고 말씀도 찾아보았지만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역시 그에게도 금식하며 기도해보았는지 묻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쫓아내고 마귀를 대적하기 위해서는 기도와 금식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58. 금식을 하는 아홉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빌립보서 3장을 보겠습니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한 적이 있고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너희에게 말하는 많은 사람들 곧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걷느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파멸이요 그들의 하나님은 그들의 배요 그들의 영광은 그들의 수치스러운 일에 있고 그들은 땅의 일들을 생각하느니라.)”(빌 3:18-19) 59. 이 세상의 것들만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섬기는 신은 자신들의 배입니다. 경배란 무엇인지 아십니까? 경배는 사모함입니다. 경배는 시간을 내어 교제를 나누는 것입니다. 경배는 자신의 것을 희생해 가며 드리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의 배를 섬기며 경배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배를 위해 시간을 보냅니다. 그들은 배를 위해 돈을 지불합니다. 그들은 배를 섬깁니다. 그들은 배가 내리는 명령에 순종합니다. 배가 바로 이 세상 사람들의 신입니다. 60. 성경은 그러한 사람들이 바로 원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원수라고 말씀하지는 않습니다. 성경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61. 여러분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는 지난 시간에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반복해서 세 번이나 기도하신 것을 살펴봤습니다. 십자가는 자기 부인을 극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뜻보다는 아버지의 뜻대로 순종하시겠다고 기도하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겠다고 하셨습니다. 62. 현대의 기독교인들이 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지셨던 것과 같은 십자가를 지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편안한 교회에 다니고 싶어하고 많은 수입을 올리고 싶어하고 병이 들면 항상 즉시 고침을 받기 원하고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친절하게 대하기 원합니다. 자신을 부인하고 지는 십자가 같은 것은 결코 원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부인하기는 결코 원하지 않습니다. 63. 사도 바울은 이 세상의 것들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는 사람들을 보기 원했습니다. 배를 섬기는 것을 그만두고 살아계시며 참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을 보기 원했습니다. 64. 우리는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스스로 돌아봐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주일 오전 예배가 끝나고 식사를 하지 않고 바로 두 시간 동안 기도회를 한다고 하면 대부분의 성도들이 집에 가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오전 예배 후에 교회에서 출장 뷔폐를 불렀다고 하면 출석률은 신기록을 세울 것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우리는 점심시간이 되기 전까지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지만 점심시간이 되면 내 배는 음식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금식은 우리가 배를 섬기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65. 마지막으로 마태복음 5장을 보겠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이기 때문이요(for they shall be filled).”(마 5:6) 바른 마음과 바른 방법과 바른 동기로 하는 금식은 의에 주리고 목마르도록 인도해 줍니다. 육신은 본능적으로 음식에 주리고 목말라합니다. 금식은 육신의 주림과 목마름이 아닌 의에 주림과 목마름으로 우리의 마음을 돌리는 계기를 만들어 줍니다. 여러분이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한다면 여러분은 채움을 받을 것입니다(shall be filled). 식탁 위에 풍성한 음식이 가득 있다 할지라도 여러분은 여전히 만족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한다면 주님께서는 여러분을 채워 주실 것입니다.

기도 응답을 막는 것들
본문내용

Sermons on Prayers James W. Knox 지음 / 이우진 옮김 제8장 기도 응답을 막는 것들 1. 우리가 만일 어떤 특정한 상태에 있다면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해 주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성경에 4번 나옵니다. 믿는 사람들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는 믿는 사람들이 기도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중재자로서 성도들의 기도를 받아서 아버지께 드립니다. 그러면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아들 하나님께서 올려 드린 기도를 받으십니다. 2. 우리는 신약성경에 나온 기도는 물질적인 것을 구하는 게 아니라 영적인 것을 구하는 것임을 살펴봤습니다. 신약성경에 나온 기도는 이 세상에서의 일시적인 삶을 위해 구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신약성경에 기록된 기도는 우리가 하는 기도나 흔히 듣는 기도와는 상당히 다른 기도였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어떤 사람이 이 세상에서 부자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을 볼 수 없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물질적인 것이나 육신적인 것을 기도하는 것을 전혀 볼 수 없습니다. 신약성경에 나온 기도는 항상 영적이고 영원한 것들과 관련이 있습니다. 3. 우리는 기도에 있어서 무엇이 중요한지 살펴봤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는 것이라면 응답을 전혀 받지 못하는 것처럼 보여도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기도하는 게 중요하다는 점도 살펴봤습니다. 4. 오늘 우리는 기도의 응답을 막는 것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바른 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구한다 할지라도 우리의 기도가 응답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이 주제를 공부하기 전에 한가지를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저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는 서로 다른 시대의 사람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다루신다고 믿습니다. 5. 주님께서는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말씀하셨지 저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저에게 하신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저에게 성전에 가서 제사를 드리라고 하시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각기 다른 시대의 사람들은 다른 방법으로 다루셨다고 믿습니다. 6. 그러나 구약성경의 대부분이 저에게 교리적으로 해당되지 않다는 이유로 거기에 기록된 거룩함에 대한 모든 말씀들이 저의 신앙생활과 전혀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은혜로 구원받았습니다. 저는 은혜로 보호받고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은혜로 복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거룩하신 분이라고 믿습니다. 저는 성경도 거룩한 책이라고 믿습니다. 거듭난 사람들 안에 거하시는 영은 거룩하신 영이라고 믿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영으로 거룩한 책을 통해 믿는 사람들을 거룩하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이러한 것을 율법주의라고 부르는 사람은 거룩함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들 외에 없습니다. 7. 저는 여러분이 교회 회원이 되기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된다고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무엇을 하지 않으면 교회에서 쫓아낼 거라는 얘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은 자유롭게 주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거룩하고 깨끗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8. 어떤 사람들은 구약성경에는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말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구약성경 39권을 통해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사람들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는 주라 변치 아니하나니…”(말3: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9. 만일 하나님께서 성령님에 의해 거듭나지도 못한 십자가 사건 이전에 살던 자신의 백성이 거룩하기를 원하신다면 거듭나고 성령님께서 내주하시는 사람들이 의롭게 살기를 얼마나 더 바라시겠습니까? 구약성경을 통해 말씀하신 대로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함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은 율법주의에 속박시키는 게 아니라 참된 자유를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10. 그리스도인은 자유롭습니다. 그러나 자유롭다는 것은 죄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이지 의로부터 자유롭다는 게 아닙니다. 바울 서신에 기록된 게 아니면 그리스도인들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 서신에서 명백하게 반대하고 있는 게 아니라면 성경의 다른 곳에서 말씀하시는 것도 지켜야 합니다. 11. 우리는 바울 서신이 아닌 다른 곳에서 말씀하시는 것도 지켜야 합니다. 그것이 바울 서신을 통해 계시된 그리스도인의 지침과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율법에서는 죄를 지으면 정해진 짐승을 희생제물로 잡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는 바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드린 희생제사로 인해 모든 죄를 깨끗이 씻은 사람은 더 이상 짐승을 제물로 드리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 서신과 모순을 일으키는 구약성경의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지침이 아닙니다. 그러나 율법에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는데 바울 서신에서도 같은 것을 말씀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율법에서 바울 서신과 일치하는 말씀을 하는 부분이 있다면 그 말씀은 에베소서나 빌립보서 만큼이나 그리스도인의 지침이 되는 것입니다. 12. 우리가 이번 시간에 찾아볼 말씀들은 모두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적용이 가능한 것들입니다. 단순히 구약성경에 나온 말씀이라고 해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로부터 기도 응답을 받기 원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모든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13. 먼저 시편 66편을 보겠습니다. “내가 마음속으로 불법에 관심을 두면 주께서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나 하나님께서 참으로 내 말을 들으셨으며 내 기도 소리에 주의를 기울이셨도다.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분께서 내 기도를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자신의 긍휼도 내게서 거두지 아니하셨도다.”(시66:18-20) 14. 성경을 성경과 비교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한 모든 말에 대해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오직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들이 무슨 쓸데없는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그것에 대하여 회계 보고를 하리라.”(마12:36)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우리의 모든 행위와 말은 주님의 판단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말을 언젠가 주님께서는 달아 보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기도를 전혀 듣지 않으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전혀 듣지 않기 때문에 주님께서도 우리의 말을 듣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15. 아버지가 아들에게 방을 청소하지 않으면 자전거를 사주지 않겠다고 말했다고 합시다. 아들이 아무리 자전거를 사달라고 졸라도 방을 치우기 전에는 얻을 수 없습니다. 아버지의 말을 존중하지 않고서는 아들의 말도 존중 받을 수 없습니다. 방을 못 치운 이유를 아무리 그럴 듯 하게 댄다 할지라도 자전거를 얻을 수 없습니다. 심은 대로 거두기 마련입니다. 16. 한 사람이 하나님께로 나아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주님(주인님)께서는 무엇인가를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나온 사람이 주님의 말씀은 전혀 듣지 않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무엇인가를 하라고 말씀하셨는데 하나님 앞에 나왔다는 사람이 그 말씀을 별로 중요한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그것은 중요한 구절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 명백하게 기록된 말씀인데도 불구하고 순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전혀 듣지 않으면서 무릎을 꿇고 “오 주님, 저는 오늘 주님 앞에 나아왔습니다.”라고 말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성령님께서는 아마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들은 행하지 아니하느냐?”(눅6:46) 17.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원하지 않고 성경말씀대로 행하기를 원하지 않고 죄를 버리려고 하지도 않고 주님께서 행하라고 하신 것도 행하지 않으면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들어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하나도 듣지 않으면서 자신이 무엇인가를 바랄 때만 하나님 앞에 나와서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며 기도에 응답해 달라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그러한 기도에는 절대로 응답해 주지 않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라고 부르면서도 주님의 말씀은 전혀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사람에게는 죄와 욕망과 탐욕과 우상숭배가 주인입니다. 18. 만일 하나님을 주님으로 부른다면 그분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분의 말씀은 전혀 듣지 않으면서 말로만 주님이라고 부른다면 결코 기도 응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바른 교회에 바른 성경을 가지고 나온다 할지라도 우리의 마음 속에 포기하지 않은 죄가 있다면 결코 기도 응답을 받을 수 없습니다. 내 마음 속에 있는 죄를 결코 주님 앞으로 가져와서 십자가에 못박으려 하지 않는다면, 그 죄를 제거해 달라고 주님께 울부짖지 않는다면, 그 죄로부터 승리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암기하고 적용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기도는 결코 응답 받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짓는 죄가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19. 마음 속에 있는 비밀스러운 죄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그러한 죄를 버리지 않으면 아무리 기도를 열심히 한다 할지라도 시간 낭비일 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결코 기도를 듣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기도하고 기도 목록을 만들고 기도에 관한 책을 읽고 기도에 관한 설교를 듣고 기도에 대해 성경공부를 해도 포기하지 않은 죄가 마음 속에 있다면 주님께로부터 아무런 응답도 받지 못할 것입니다. 20. 기도 응답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들으시지 않기 때문도 아니고 들으실 수 없기 때문도 아니고 능력이 없으시기 때문도 아닙니다. 기도 응답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기 때문이며 마음 속에 죄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1. 야고보서 5장을 보겠습니다. “…의로운 자의 효력 있고 뜨거운 기도는 많은 유익이 있느니라. 엘리야는 우리와 같이 동일한 성정의 지배를 받은 사람이로되 비가 오지 않기를 그가 간절히 기도하니 삼 년 육 개월 동안이나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였고 그가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자기 열매를 내었느니라.”(약5:16-18) 22.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자의 효력 있고 뜨거운 기도는 많은 유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죄인들을 구원해달라고 기도하면서 복음은 전혀 전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자신은 교회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교회를 도와달라고 기도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자신은 마음 속에 은밀한 죄를 가지고 있으면서 다른 형제 자매들이 거룩한 삶을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게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성경은 “누구나 기도하기만 하면 많은 유익이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의로운 자의 효력 있고 뜨거운 기도는 많은 유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23.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발적으로 사는 것입니다. 성경을 머리로 알지만 전혀 실행하지는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은혜의 왕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갈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지성소에 들어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성소에 들어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께 말씀을 드립니다. 그곳은 우리의 더러운 죄를 가지고 들어가기에 적절한 장소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우리가 주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는 깨끗한 손과 깨끗한 발과 깨끗한 마음과 깨끗한 생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24.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소유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의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죽으면 하늘나라로 갈 수 있게 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소유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도 들림 받아 올라갈 것이고 우리의 몸은 변화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가 은혜 아래 살고 있다 할지라도 바르게 행하고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율법주의가 아니라 영적 상식입니다. 25.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방법으로 우리가 원하는 때에 하나님께로부터 응답 받기 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기는 원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은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입으로는 우리가 주님의 종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분의 말씀에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26. 우리의 기도가 응답 받지 못하는 둘째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야고보서 1장을 보겠습니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너그러이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그것을 그에게 주시리라. 그러나 그는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흔들리지 말지니라. 흔들리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나니 그 사람은 자기가 무엇을 주께 받을 줄로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은 사람은 자기의 모든 길에서 안정이 없느니라.”(약1:5-8) 27. 주님께서는 만일 우리가 두 마음을 품는다면 절대로 하나님께로부터 응답을 받으리라고 기대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의 어떤 부분은 사실이라고 생각하고 다른 부분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거나, 성경의 어떤 말씀은 실행해야 하지만 다른 부분은 실행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거나, 성경의 어떤 부분은 좋아하고 다른 부분은 싫어하거나, 성경의 어떤 부분에는 순종하고 다른 부분은 무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28. 우리는 하나님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만 하나님 앞에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문제를 해결해 주시면 다시 하나님 없는 삶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자기 마음대로 살다가 하나님이 필요할 때만 기도하고 필요가 충족되면 다시 자기 마음대로 삽니다. 성경은 “두 마음을 품은 사람은…무엇을 주께 받을 줄로 생각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29. 야고보서 1장은 하나님의 축복과 선물과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들에게 주시는 모든 좋은 것들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무엇인가를 받기를 원하면서 하나님은 원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조롱당하지 않으십니다. 먼저 하나님의 왕국과 그분의 의를 구해야지 나머지 모든 것을 더해 주시는 것입니다(마6:33). 30.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들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원하는 바를 구하라. 그러면 그것이 너희에게 이루어지리라.”(요15:7) 주님께서는 아무렇게나 살면서 원하는 것을 구하면 응답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적이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말씀 안에 거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구하는 것을 응답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31. 성경은 우리가 두 마음을 품고 있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두 마음을 품고 있으면 완전히 세상적인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죄를 미워하신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헌신된 사람이 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이 주는 기쁨을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32. 베드로전서 3장을 보겠습니다. “아내들아,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것은 누가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하여도 그들 또한 말 없이 아내의 행실을 통해 얻고자 함이니 두려움이 동반된 너희의 정숙한 행실을 그들이 눈여겨보느니라.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땋고 금으로 치장하며 옷을 차려입는 그런 외적 단장으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의 감추어진 사람으로 하되 썩지 아니하는 것 즉 온유하고 조용한 영의 장식으로 할지니 그것은 하나님의 눈앞에서 지극히 값진 것이니라. 옛적에 하나님을 신뢰한 거룩한 여자들도 이런 방식으로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여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主)라 부르며 그에게 순종한 것 같이 너희가 잘 행하고 어떤 놀라운 일에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면 그녀의 딸들이 되느니라. 남편들아, 이와 같이 너희도 지식에 따라 그들과 동거하고 아내를 더 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상속받을 자로 여기고 존중하라. 그리하여야 너희 기도가 방해를 받지 아니하리라.”(벧전3:1-7) 33. 성경은 이와 같이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해야 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말씀에 순종하는 게 너무 어렵다고 합니다. 저는 그런 사람들에게 고린도전서 10:13로 위로해 줍니다.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있는 시험 외에는 너희가 어떤 시험도 당하지 아니하였나니 하나님은 신실하사 너희가 감당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시험 당하는 것을 너희에게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또한 그 시험과 함께 피할 길을 내사 너희가 능히 그것을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34. 다시 주제로 돌아오겠습니다. 자매님들, 여러분의 기도를 방해하는 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결혼하신 자매님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여러분이 남편과 바른 관계에 있지 않다면 여러분의 기도는 응답 받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보다 잘 난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훌륭한 남편에게만 복종하라.”고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남편에게 복종하라…그리하여야 너희 기도가 방해를 받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5. 여자의 머리는 남자고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 자매들에게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主)라고 부르며 순종한 것처럼 그렇게 순종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야 기도가 방해를 받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질서를 무시하고 하나님께 기도 응답을 해 달라고 하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일입니다. 36. 이제 형제님들 차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남편들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남편들이 영적 지도력을 가지고 가정을 인도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적 원칙대로 가정을 인도하고 가정의 필요를 공급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이들이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도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야 기도가 방해를 받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남편과 아내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기도가 방해를 받을 것입니다. 37. 자신의 집안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면서 교회를 다스리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정 생활은 엉망이면서 교회에서만 영적 거장처럼 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지 않는다면 결코 말씀의 사역을 할 수 없습니다. 아이들에게는 본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믿는지 여러분이 본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가정 생활이 엉망이면 영적 생활도 엉망입니다. 가정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나님께서도 기도에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38. 마태복음 18장을 보겠습니다. “또한 만일 네 형제가 네게 범법하거든 가서 너와 그만 따로 있을 때에 그의 허물을 그에게 일러 주라. 만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었느니라.”(마18:15) 하나님의 말씀이 정중함을 얼마나 중요하게 가르치고 있는지 보이십니까? 누군가 잘못을 하면 그 사람에게 개인적으로 가서 그의 잘못을 지적하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고귀한 방식입니다. 39. 계속해서 다음 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가 네 말을 들으려 하지 아니하거든 너와 함께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모든 말을 확증하라. 만일 그가 그들의 말 듣기를 무시하거든 교회에 그것을 말하되 그가 교회의 말 듣기를 무시하거든 너는 그를 이교도나 세리같이 여기라.”(마18:16-17) 40. 성경적 순서는 누군가 잘못을 범하면 먼저 한 사람이 가서 그에게 말하고 듣지 않으면 두세 사람이 가서 말하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교회에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완전히 반대가 되었습니다. 개인적인 권면 없이 바로 교회에서 광고하므로 잘못을 범한 사람이 바로 잡힐 수 있는 기회를 완전히 잃어버리고 맙니다. 41. 주님께서는 잘못을 범한 형제를 바로잡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잘못을 바로 잡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마태복음 5장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네가 네 예물을 제단으로 가져오다가 너를 대적할 어떤 일이 네 형제에게 있음을 거기서 기억하거든”(마5:23) 42. 이것은 여러분이 누군가에게 화를 내고 있는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화를 내고 있는 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잘못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먼저 와서 관계를 바로 잡으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바른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관계를 바로 잡으려고 해야 합니다. 43. 계속해서 다음 절을 보겠습니다. “네 예물을 거기에, 제단 앞에 두고 네 길로 가서 맨 먼저 네 형제와 화해하고 그 뒤에 와서 네 예물을 드리라.”(24절) 주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지 아십니까? 하나님께 영적 예배를 드리고 주님과 교제를 나누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가능하다면 다른 형제 자매들과 평화롭게 사는 것입니다. 44.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모두 한 몸에 속한 지체이며 그 몸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팔이 발과 다툴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팔과 다리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팔도 동일한 머리의 지배를 받고 다리도 동일한 머리의 지배를 받습니다. 여러분은 저를 미워하거나 증오하거나 싫어하면서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과 바른 관계에 있을 수는 없습니다. 45. 성경은 “…자기가 본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가 어찌 자기가 보지 못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으리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자기 형제를 사랑하라는 이 명령을 우리가 그분께 받았느니라.”(요일4:20-21)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해도 다른 형제를 미워하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미워하는 그 형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미워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46. 여러분은 저를 사랑한다고 해 놓고 제 딸의 얼굴에 주먹을 날릴 수 없습니다. 저를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제 딸을 때리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제 아내의 머리채를 잡아 땅에 던져버렸다고 합시다. 제가 그 사람에게 “지금 뭐 하는 겁니까?”하고 소리치니까 그가 저에게 “형제님 저는 형제님을 사랑합니다.”라고 한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를 사랑하면 제 아내를 때리지 않을 것입니다. 저를 사랑한다면 저의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을 그런 식으로 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47. 입으로는 하나님께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 다른 형제 자매를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주님께서 그 사람의 기도를 들어주시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우리가 미워하는 그 형제 자매와 관계를 회복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다시 주님께 나아와서 주님을 섬기고 기도하고 교제를 나누기를 원하십니다. 48. 마음 속에 죄가 있거나 두 마음을 품거나 가정 생활이 엉망이거나 교회에서 다른 형제 자매와 적대시 하고 있다면 결코 기도가 응답 받지 못할 것입니다. 야고보서 5장을 보겠습니다. “너희 잘못들을 서로 고백하고 너희가 병 고침을 받도록 서로를 위해 기도하라. 의로운 자의 효력 있고 뜨거운 기도는 많은 유익이 있느니라.”(약5:16) 49. 순서를 잘 보십시오. 먼저 잘못들을 서로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고 서로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먼저 서로 잘못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고 서로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다른 형제 자매들과 먼저 관계 회복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깨끗한 마음으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앞에 나아와 기도할 수 있습니다. 50. 성경은 먼저 다른 형제 자매들과 관계를 바르게 하지 않으면 기도가 방해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오늘날 수많은 기도가 하나님께 올라가지 못하고 묶여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능력으로 다른 지체들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교제를 나누고 기도가 방해 받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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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s on Prayers James W. Knox 지음 / 이우진 옮김 제9장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 1. 오늘은 기도에 대해 공부하는 마지막 시간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와 그분의 기도 생활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신약성경에 나온 기도와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 그리고 어떻게,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지, 그리고 지속적으로 하는 기도에 대해 공부했습니다. 2. 오늘은 누가복음을 통해서 인간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떻게 기도하셨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먼저 몇 가지 사실을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께서 만들지 않으신 것은 없습니다. 모든 것이 주님에 의해 창조되었습니다. 요한복음 1장은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이 위대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3:16도 같은 진리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논쟁의 여지가 없이 하나님의 성품의 신비는 위대하도다. 하나님께서 육체 안에 나타나시고 성령 안에서 의롭게 되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이방인들에게 선포되시고 세상에서 믿기시고 영광 속으로 올려져서 영접을 받으셨느니라.” 3. 위대하신 창조자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온전히 하나님이셨지만 인간의 몸을 입고 인간이 되어 오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고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인간이 인간을 구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은 인간이기만 하셨다면 결코 우리를 구원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인간을 구원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4.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분은 하나님이시기는 하지만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분이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시지만 참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음식물을 섭취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음식을 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주무실 필요가 없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주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육신의 고통을 느끼지 않으십니다. 누구도 하나님을 고문하거나 하나님께 고통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육신의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주님은 인간으로 오셨고 참 인간이셨습니다. 5. 사복음서는 서로 다른 관점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진술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을 유대인들의 왕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의 왕국과 그들의 왕이신 메시야에 대해 강조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을 주님의 종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해 강조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처음부터 존재하셨던 하나님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6. 누가복음의 초점은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있습니다. 누가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시는 모습을 거듭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은 두 장을 넘기기 전에 예수님의 기도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성경은 베드로전서 2장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너희가 심지어 그 일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나니 그리스도께서도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심으로 우리에게 본을 남기사 너희가 자신의 발자취를 따라오게 하셨느니라.”(벧전2:21) 7. 성경은 갈라디아서와 로마서 등 신약성경의 여러 서신들을 통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처럼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우리의 인생을 사는 동안,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행하는 모든 일을 통해, 더욱 예수 그리스도처럼 되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처럼 되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8.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성경을 열심히 읽는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을 알아갑니다. 그래서 바른 것을 말하고 바른 일을 하게 됩니다. 물론 바른 것을 말하고 바른 일을 행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바른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행동을 흉내 낼 수 있을지는 몰라도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대로 예수님처럼 될 수는 없습니다. 9.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간 사람일수록 더욱 기도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됩니다. 믿음이 장성해 질수록 기도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이 기도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영적으로 성장했다고 해서 더 이상 기도할 필요가 없어진 게 아닙니다.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처럼 되어 갈수록 우리는 더 많은 시간을 기도하는데 보내게 될 것입니다. 10. 인간의 몸을 입고 인간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일을 할 때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어떠한 일을 하시기 전에 항상 먼저 기도하셨습니다.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순종하실 준비가 되어있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누가복음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를 살펴보겠습니다. 11. 예수님께서는 베들레햄에서 탄생하셨고 12살에는 성전에 가셨습니다. 주님께서 30세가 되기 전에 대해서는 성경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다만 마가복음 6장에서는 주님께서 30세까지 나사렛에서 목수로 지내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목수셨습니다. 이외에 예수님께서 30세 전에 어디서 무엇을 하셨다는 이야기들은 다 허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어머니와 아버지께 순종하여 목수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양아버지인 요셉은 목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양아버지의 가게에서 목수일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에는 회당에 가서 하나님께 경배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약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명령대로 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30세 전에는 나사렛에서 목수로 사시며 부모님과 하나님께 순종했습니다. 12. 예수님께서는 30세가 되셨을 때 요단강으로 오셔서 침례인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시고 나서 지상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누가복음 3장을 보겠습니다. “온 백성이 침례를 받았을 때에 예수님께서도 침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시는데 하늘이 열리며 성령님께서 몸의 형태로 비둘기같이 그분 위에 내려오시고 하늘로부터 한 음성이 나서 이르시되,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매우 기뻐하노라, 하시니라.”(눅3:21-22) 13. 성경은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사역은 항상 기도로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공적으로 하는 사역은 반드시 기도로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섬기는 모든 일은 기도로 시작해야 합니다. 만일 육신을 입고 오신 아들 하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하실 때 기도로 시작하셨다면 우리는 얼마나 당연히 모든 일을 기도로 시작해야 하겠습니까? 14. 오순절 날 하나님의 영이 믿는 자들 위에 임할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제자들은 카드놀이를 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TV를 보고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기도하고 있었고 하나님의 영은 그들 위에 임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거리에 나가서 복음을 선포했고 삼천 명이 구원받고 교회에 더해졌습니다. 15. 우리가 따라야 할 본이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공적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주님의 본을 받아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반드시 기도해야 합니다. 16. 사람이 구원받고 침례를 받고 주님을 따르려고 하면 이 세상은 방해를 하기 시작합니다. 주님을 위해 살려고 하지만 이 세상은 그렇게 하도록 가만히 놔두지 않습니다. 세상은 우리가 주님도 섬기고 세상도 섬기고 마귀도 섬기고 육신도 섬기고 성경도 읽고 세상적인 책들도 읽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은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실 겁니다. 주님께서는 항상 모든 일을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해 드리기 위해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항상 모든 말을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려드리기 위해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지상에 계실 동안 자신의 모든 인생을 통해 하나님과 인간을 섬기기 위해 사셨습니다. 17. 누가복음 5장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명성이 더욱 널리 퍼지매 큰 무리들이 함께 와서 말씀도 듣고 또 그분을 통해 자기들의 병약함도 고치려 하더라. 그분께서 광야로 물러가사 기도하시더라.”(눅5:15-16) 18. 아무리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구원받게 한다 할지라도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지 않는다면 실패한 인생일 뿐입니다. 아무리 많은 설교를 하고 책을 쓰고 심방을 한다 할지라도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큰 무리가 와서 예수님께 말씀도 듣고 병약함도 고침을 받으려고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전체 무리를 뒤로하고 광야로 물러가서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왜 그러셨는지 아십니까? 먼저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지 않는다면 모든 일이 소용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9. 우리가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지 않는다면 아무리 하나님을 열심히 섬겨도 우리는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하고 기력만 소진될 뿐입니다. 누구도 예수님께서 하셨던 것보다 더 큰 일을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누구도 예수님보다 사람들에게 더 많은 영향을 끼치지는 못할 것입니다. 누구도 예수님보다 큰 책임을 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해야 할 많은 일들을 뒤로 두고 먼저 기도로 하나님 아버지와 교제를 나누셨습니다. 20.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는 많은 설교자들이 강단에 서서 설교하고 있습니다. 심방을 다니고 복음을 전합니다. 사람들과 만나고 회의를 주제합니다. 문제는 그렇게 열심히 주님을 섬기느라 충분한 시간을 들여 기도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지는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일을 한다 할지라도 기도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지 않는다면 가장 중요한 것을 간과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해야 할 일이 많았지만 기도로 아버지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것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21. 누가복음 6장을 보겠습니다. “날이 밝으매 그분께서 자기 제자들을 부르사 그들 중의 열둘을 택하시고 또한 그들에게 사도라는 이름을 주시니라.”(눅6:13)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중에 열둘을 택하시고 사도라고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중의 투표로 사도를 선출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헌금을 많이 한 사람을 사도로 선택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열두 사도를 선택하셨을까요? 답은 12절에 있습니다. “그 무렵에 그분께서 기도하러 산으로 들어가사 밤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니라.” 22. 성경은 야고보서 1:5장에서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너그러이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그것을 그에게 주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모르겠다면, 누구를 선택해야 하는지, 혹은 누구를 선택하지 않아야 하는지 모르겠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르겠다면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십시오.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제자들 중에 누구를 사도로 선택해야 하는 지와 같은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는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동전을 던져서 결정하신 것도 아니고 투표를 하신 것도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밤새도록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23. 직장문제나 이사문제나 배우자 문제나 그 밖의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모른다면, TV를 끄고 잡지를 덮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와 주님께 지혜를 구하십시오. 하나님과 기도로 교제를 나누기 전에는 결코 지혜를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신다면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점에 있어서 우리에게 좋은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경험이나 개인적인 선호를 따라 결정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기도로 하나님과 충분한 교제를 나눈 후에 결정을 내리셨습니다. 24.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을 보기를 원하십니까? 사람들이 성경을 깨닫고 영적으로 성장해 가는 것을 보기 원하십니까? 누가복음 9장을 보겠습니다.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침례자 요한이라, 하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며 다른 이들은 옛 대언자들 중의 하나가 다시 일어났다고 하나이다, 하매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나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니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그분께서 그들에게 엄히 명하사 아무에게도 그것을 말하지 말라고 명령하시고”(눅9:19-21) 25. 베드로는 엄청난 고백을 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았던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단순히 인간이 아니며, 단순히 대언자도 아니고, 단순히 종교 지도자도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았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6장에서 이러한 베드로의 고백이 바로 기초이며 그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6. 사람들의 눈이 열려서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고 공개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하게 되기를 원하신다면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다시 누가복음 9장을 보겠습니다. “그분께서 홀로 기도하실 때에 그분의 제자들이 그분과 함께하더라. 그분께서 그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니”(눅9:18) 27. 베드로의 눈을 가리던 것이 벗겨져 그가 예수님께서 어떤 분인지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궁금하십니까? 예수님께서 기도하셨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기적을 보았고 큰 무리를 보았습니다. 주님께서 가르치시고 설교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주님께서 얼마나 완벽한 분이신지 옆에서 지켜봤습니다. 그러나 눈이 열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게 된 것은 예수님께서 기도하시고 난 이후였습니다. 28. 육신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인 그리스도인들이 되고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게 되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구원받게 되는 비결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기도입니다. 우리는 가르치고 교육하고 전도하고 섬기고 도와주고 수고하고 심을 수 있지만 만일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다면 이 모든 것들은 헛된 실행이 되고 맙니다. 우리 교회가 성장 하기 원한다면, 다른 형제들이 성장하기 원한다면 기도해야 합니다. 찬송도 좋고, 설교도 좋고, 성경공부도 좋아도 기도가 없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29. 주님의 모든 능력과 영광의 비결은 기도에 있었습니다. 다시 누가복음 9장을 보겠습니다. “이 말씀들을 하신 뒤 여드레쯤 되어 그분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취해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시더라. 그분께서 기도하실 때에 그분의 얼굴 모습이 변하고 그분의 옷이 희게 되어 눈부시게 빛나더라.”(눅9:28-29) 30. 예수님께서는 바다 위를 걸어 가실 때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화되지 않으셨습니다. 나사로를 살리실 때 변화되지 않으셨습니다. 닫힌 문을 통과하실 때 변화되지 않으셨습니다.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실 때 변화되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실 때 변화되셨습니다. 31. 여러분은 하나님의 영광을 맞보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은 기도할 때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할 때 임했습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주님께 바른 찬양을 드리고 바른 사람들과 교제를 나누고 바른 성경을 읽고 바른 설교를 듣는다 할지라도 기도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영적으로 점점 쇠약해 질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은 결코 우리에게 임하지 않을 것입니다. 32. 우리가 아무리 복음을 열심히 전하고 전도지를 열심히 나눠주고 문서사역을 열심히 하고 인터넷을 통해 말씀을 전한다 할지라도 기도하지 않으면 아무도 우리에게 와서 진리를 배우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11장을 보겠습니다. “그분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다가 마치시매 그분의 제자들 중의 하나가 그분께 이르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 같이 우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소서, 하니”(눅11:1) 33. 예수님께서 기도를 하시니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배우기를 원했습니다. 우리가 계속 전도지를 나눠주고 복음을 전하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진리를 증언하고 거리에서 설교를 해도 기도가 없다면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할 것입니다. 만일 기도가 아무런 효과가 없는 것이라면 예수님께서는 시간 낭비를 하신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단 한 시간도 낭비를 하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필요가 있었다면 우리 모두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중요한 결정을 하실 때 아버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할 필요가 있었다면 우리도 아버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 모든 일을 하시기 전에 기도하셨다면 우리도 모든 일을 하기 전에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34.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저는 이 기도에 대한 공부가 즐겁지만은 않습니다. 우리의 육신은 기도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기도는 육신을 부인하는 일입니다. 특히 여러분이 아무리 열심히 기도를 해도 아무런 응답이 없는 것 같아 보일 때가 있습니다. 다른 형제를 위해 열심히 기도를 했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을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마귀는 우리에게 “거봐. 기도해 봐야 아무런 소용도 없지.”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누가복음 22장을 보겠습니다. “또 주께서 이르시되,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갖기 원하였으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쇠하지 않도록 기도하였은즉 너는 돌이킨 뒤에 네 형제들을 강하게 하라, 하시니”(눅22:31-32) 35. 누가복음 22:32에서 주님께서는 믿음에 있어서 실패하게 될 베드로를 위해 기도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겟세마네에 함께 갔을 때도 베드로는 깨어 기도하지 못하고 자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하셨는지 아십니까?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위해 기도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사람들의 손에 잡혀가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주님을 잡으러 왔을 때 베드로는 칼을 빼어 공격했습니다. 왜 그랬는지 아십니까?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주님의 말씀을 믿는데 실패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베드로를 위해 기도해주셨습니다. 베드로가 잡혀가는 주님을 멀리서 따라갈 때 소녀가 와서 그에게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냐고 물었을 때 베드로는 강력하게 부인하며 자신은 주님을 모른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베드로가 저주를 하며 예수님을 부인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믿음에 있어서 실패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베드로를 위해 기도해 주셨습니다. 바울의 증언에 따르면 베드로는 율법주의자들의 위선에 동참했습니다. 바울은 그런 베드로를 책망했습니다. 베드로는 믿음에 있어서 실패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베드로를 위해 기도해 주셨습니다. 36. 이런 베드로가 무엇을 기록했는지 아십니까? “너희가 다시 태어난 것은 썩을 씨에서 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에서 난 것이니 살아 있고 영원히 거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이니라.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사람의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라. 풀은 마르고 그것의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영원토록 지속되나니 복음으로 너희에게 선포된 말씀이 이 말씀이니라.”(벧전1:23-25) 37.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위해 기도하는 것을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반하거나 그의 믿음이 실패를 할 때에도 여전히 그를 위해 기도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이러한 모습을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아십니까? 우리는 보이는 결과를 위해 기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지상에 계실 때 베드로를 위해 기도하신 자신의 기도가 응답 받는 것을 보지는 못하셨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기도와는 반대로 베드로는 주님을 배반하고 실망만 안겨 주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를 위해 끝까지 기도해 주셨습니다. 38. 우리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교회를 망치는 사람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단지 몇 달 기도하다가 마는 게 아니라 지속적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단지 몇 달간만 기도하시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해 주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저를 위해 기도해 주고 계신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는 게 있습니까? 그렇다면 절대 기도를 그만두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는 한 절대 기도를 그만두지 마십시오. 39. 저는 40년 동안 자신의 아들이 구원받기를 기도한 자매님을 알고 있습니다. 그 자매님이 왜 40년간이나 아들을 위해 기도했는지 아십니까? 자신의 아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왜 누군가를 위해 몇 달간 기도하다가 포기하고 마는지 아십니까? 우리가 기도해준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충분히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서로를 사랑한다면 아무리 실망스러운 일이 일어난다 해도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것을 그만두지는 않을 것입니다. 40. 다시 누가복음 22장을 보겠습니다. “그분께서 나가사 늘 하시던 대로 올리브 산으로 가시매 그분의 제자들도 그분을 따라갔더니 그분께서 그곳에 계시면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시험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하시고 그들에게서 물러나 돌을 던지면 닿을 수 있는 곳으로 가사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이 아니옵고 오직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하늘로부터 한 천사가 그분께 나타나 그분을 강건하게 하더라.”(눅22:39-43) 41. 누가복음을 보면 겟세마네에서 주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완전히 포기하시고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왜 교회에 나오지 않는지 아십니까?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아버지, 내 뜻이 아니옵고 오직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왜 복음을 전하지 않는지 아십니까? 성경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는 제 입을 열어 복음을 전하고 싶지 않습니다. 창피하고 귀찮고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저의 입술과 마음에 힘을 주셔서 기쁨으로 복음을 전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것입니다. 42.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뜻대로 하지 않으시고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에 순종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모든 사람들의 죄를 대속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기도로부터 시작된 일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합니다.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잔이 자신에게서 옮겨지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뜻대로 하지 않고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43. 우리에게는 원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정말 좋지 않은 상황에 처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폭행을 당하고 강제로 십자가를 지고 언덕에 올라 손발에 못이 박히고 십자가에 달리는 정도의 나쁜 일을 격지는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나쁜 일을 많이 당했다 해도 예수님께서 당하신 것만큼 나쁜 일을 당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무엇을 하셨는지 아십니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도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44. 누가복음 23장을 보겠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시더라…”(눅23:34) 45.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를 예수님처럼 다듬어 가려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있는 그 누구도 당해본 적이 없는 대우를 당하셨습니다. 자신의 형제들과 제자들과 친구들과 원수들에게 배반당하고 끔찍한 일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원수들을 죽여달라고 기도하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의 원수들이 어려운 일을 당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의 원수들을 바로 잡아 달라고 기도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자신에게 잘못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선하게 대해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친절하게 대해주시고 긍휼을 베풀어주시기를 기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원수들을 위해 기도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 주셨습니다. 46. 이제 마지막으로 다시 누가복음 23장을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외치시고는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영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나이다, 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신 뒤에 숨을 거두시니라.”(눅23:46) 47. 예수님께서는 지상사역을 시작하실 때 기도로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상사역을 시작하시면서 기도를 하실 때 성령님께서 임하셨습니다. 그리고 지상사역을 마치실 때 자신의 영을 아버지께 맡기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은 기도로 가득 차 있습니다.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끝났습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께서 기도하셨다면 그분을 따르는 우리들은 얼마나 더 기도해야 하겠습니까? 48. 우리가 오늘 살펴본 내용을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침례를 받으실 때 기도하셨고, 제자들을 선택하실 때 기도하셨으며, 기도하실 때 하나님의 영광이 임했고, 기도하시니 사람들이 배우러 왔고, 형제들이 믿음에 굳게 서게 하시기 위해 기도했으며, 자신의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실 때 기도하셨고, 원수들을 위해 기도하셨으며,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실 때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이 모든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따라야 할 완벽한 기도의 길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49. 기도는 하나님께서 아시는 것처럼 나는 알지 못한다고 하는 고백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있으나 나는 하지 못한다는 고백입니다. 기도는 나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이 될 수 없지만 주님께서는 나를 그렇게 만드실 수 있다고 하는 고백입니다. 기도는 나는 할 수 없고, 시작했지만 마칠 수 없으니 하나님께 제발 나를 도와달라고 하는 울부짖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기도의 생애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셨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기도해야 하겠습니까? 50.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찬양을 부릅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되고 싶다는 찬양을 부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 가운데 놀라운 일을 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맞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도하기는 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아들 하나님도 기도를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기도해야 하겠습니까? 51. 우리가 아무리 기도에 대한 설교를 많이 듣고 기도에 대한 성경공부를 한다 해도 기도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일입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다면 지금 이 공부도 시간 낭비일 뿐입니다. 우리가 기도에 대한 아무리 많은 지식과 정보를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기도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우리가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모든 것은 헛된 일이고 시간 낭비일 뿐입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그저 헛된 종교행위일 뿐입니다. 52. 우리는 우리 교회가 있는 지역에서 간증을 지키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일하는 직장에서 간증을 지키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있는 곳에서 진리의 말씀을 증언하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분을 따르는 우리도 기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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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식에 관한 성경적 교리
본문내용

Sermons on Prayers James W. Knox 지음 / 이우진 옮김 제7장 금식에 관한 성경적 교리 1. 우리는 성경을 통해 기도가 무엇인지 공부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에 나온 모범적인 기도도 살펴보았습니다. 신약성경에 나온 그리스도인들의 기도는 항상 다른 사람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신약성경에 나온 기도 중 그 어느 것도 쇼핑 리스트를 외듯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없습니다. 기도는 주님 앞으로 나아와 다른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입니다. 2. 신약성경에 나온 기도 중 오직 단 한번만 자신을 위해 간구하는 기도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몸에 있는 육신의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세 번 주님께 간구했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는 응답 받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약성경에서 자신을 위해 간구한 유일한 기도였습니다. 다른 모든 기도는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복과 도움이 임하기를 간구하는 것이었습니다. 3. 우리는 지난 시간에 반복해서 하는 기도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는 기도라면 우리는 주님께 계속 해서 끊임없이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응답해 주지 않으시거나 더디게 응답해 주시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구해야 합니다. 4. 우리는 오늘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잘 연구하지 않는 교리에 대해 공부할 것입니다. 이 교리는 육신이 원하는 것과 정확히 반대쪽에 있기에 인기가 없는 교리 중 하나입니다. 오늘 우리는 금식에 관한 교리를 공부할 것입니다. 신구약성경 전체에 걸쳐 하나님께 기도응답을 받기 위해 금식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는 먼저 성경에 나온 기도에 관한 여섯 가지 명령을 살펴볼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금식해야 하는 열 가지 성경적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5.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자신을 육체가 아닌 성령님의 통제아래 두기 위해 투쟁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교리를 실행하느냐의 문제는 그 교리에 대한 말씀이 얼마나 성경에 많은가에 있지 않습니다. 문제는 바로 우리의 마음에 있습니다. 6. 성경에는 마약에 대한 직접적인 말씀은 없습니다. 성경에는 코카인이나 마리화나에 대한 말씀도 없습니다. 성경에는 담배나 니코틴에 대한 말씀도 없습니다. 이러한 것들에 대한 구체적인 말씀이 없다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이러한 것들이 아닌 성령님께 내어 드려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7. 절제에 대한 설교는 인기가 없습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통제 아래서 살아야 합니다. 육신의 만족을 위해 사는 것은 성령님의 통제를 벗어난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님의 통제를 벗어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음식의 지배아래 살아갑니다. 선교를 지원할 돈이 없을 때에도 자신들의 배를 채울 돈은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느냐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음식을 통제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것의 통제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8. 마태복음 9장을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신랑이 혼인 방 아이들과 함께 있을 동안에 그들이 애곡할 수 있겠느냐? 그러나 날들이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때에는 그들이 금식할 것이니라.”(마 9:15) 9. 성경에 의하면 신랑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다른 사람들은 다 금식을 하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왜 금식을 하지 않는지 질문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자신의 제자들이 금식을 할 이유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신랑이 없을 때에는 금식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신랑이신데 자신이 제자들을 떠나시면 제자들이 금식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하늘나라에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때로부터 다시 오실 때까지가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금식할 시기입니다. 10.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실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종교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의를 자랑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단 한번도 그들이 선하게 사는 것을 책망하신 적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책망하신 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의를 신뢰하는 점이었습니다. 11. 마태복음 23장도 보겠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바치되 율법의 더 중대한 문제인 판단의 공의와 긍휼과 믿음은 무시하였도다. 너희가 마땅히 이것들을 행하였어야 하거니와 다른 것도 행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 말아야 하느니라.”(마 23:23) 3절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너희에게 지키라고 명하는 모든 것은 지키고 행하되 그들의 행위대로 하지는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는 아니하며” 12 바리새인들은 자만심에 빠져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드리는 십일조와 종교적인 집회에 참석하는 것과 자주 금식하는 것을 자랑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는 것을 자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가르치는 것은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말만하고 행위는 없기 때문에 위선자들이었지만 그들의 말은 그대로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13. 마태복음 5장을 보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를 능가하지 아니하면 너희가 결코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 14. 우리는 오늘 바리새인들이 왜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지 못했는지에 대해 살펴보지는 않을 것입니다. 문제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한 말은 옳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가르친 것은 옳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잘못된 자들이었지만 바른 것을 가르쳤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모신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구원자로 모시지 않은 바리새인들보다 훨씬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15.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하늘로 올라가시면 제자들이 금식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지 않았던 바리새인들도 금식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은 더욱 열심히 금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6. 예수님만이 금식에 대해 가르치신 게 아닙니다. 금식은 초대 교회에서 실행하던 교리 중 하나였습니다. 사도행전 13장을 보겠습니다. “그들이 주를 섬기며 금식할 때에 성령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서 시킬 일을 위해 그들을 내게로 구별하라, 하시니 그들이 금식하며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한 뒤 그들을 보내니라.”(행 13:2-3) 초대 교회에서 실행하던 것 중 하나는 기도하며 금식하는 것이었습니다. 17.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의 사도였습니다. 그는 성도들에게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처럼 성도들은 자신을 따르라고 가르쳤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을 보겠습니다. 그는 여기서 자신의 삶의 경험을 나누고 있습니다. “또 지치고 아프고 여러 번 밤을 새우고 굶주리고 목마르고 여러 번 금식하고 추위를 당하고 헐벗었노라.”(고후 11:27) 18. 성령님께서는 여기서 바울이 굶주린 것과 금식한 것을 구분해 주고 계십니다. 바울은 음식을 먹고자 했지만 음식이 없어서 먹지 못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먹을 음식이 있었지만 먹지 않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할 때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께서 승천하시고 나면 자신의 제자들이 금식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초대 교회는 금식했습니다. 우리에게 본으로 주신 사도 바울도 여러 번 금식했습니다. 19. 한 가지 예를 더 보겠습니다. 성경은 금식이 건강한 혼인생활에 필요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7장을 보겠습니다. “너희는 서로를 속여 권리를 빼앗지 말라. 너희가 금식과 기도에 전념하기 위하여 동의를 구해 얼마 동안 그리하는 것은 예외이나 다시 함께하라. 이것은 너희가 참지 못함으로 인해 사탄이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전 7:5) 20.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신약성경의 가르침과 초대 교회의 본과 사도 바울의 본에 따르면 금식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필수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금식하는 방법을 자세히 알려주셨습니다. 금식은 항상 음식과 음료에 대한 자발적인 거절입니다. 저는 지금 금식을 하면 건강 더 좋아진다거나 다이어트에 좋다거나 하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성경적인 금식은 자발적으로 음식을 먹지 않고 음료를 마시지 않는 것입니다. 21.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금식은 육신의 욕망을 완전히 부인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은 무엇인가를 먹기 원합니다. 그런데 금식을 함으로 더 이상 육신을 섬기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명하는 것입니다. 금식은 육신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의미입니다. 육신은 무엇인가를 마시기 원합니다. 금식을 하므로 더 이상 육신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을 찾겠다는 것입니다. 22. 성경은 우리가 모두 육신적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자신은 육신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만일 여러분이 자신은 영적이라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의 육신에게 내일 아무것도 먹지 않을 것이라고 말해 보십시오. 아마 한 달간 굶은 사람처럼 음식을 찾게 될 것입니다. 하루 종일 아무런 음료도 마시지 않으면 며칠 동안 사막을 헤맨 사람처럼 음료를 구하게 될 것입니다. 아마 냉장고가 자신에게 말하는 것처럼 환청이 들릴 것입니다. 23. 저는 “금식을 통해 건강해 지는 법” 혹은 “금식을 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같은 책을 도서관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이러한 책들은 모두 넌센스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육신은 음식을 원합니다. 금식은 건강을 위해 하는 것도 아니고 기분전환이나 다이어트를 위해 하는 게 아닙니다. 금식은 오직 하나님만을 찾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24. 사람들은 바빠서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합니다. 너무 바빠서 주님을 찾을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바쁜 사람도 식사는 합니다. 바빠서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하면서도 시장에 가서 식료품을 구입하고 요리를 합니다. 아무리 바쁜 사람도 식당에 가서 주문을 하고 식사를 합니다. 바빠서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하지만 육신을 섬기는 데는 시간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육신을 섬기는 것을 잠시 멈추면(금식하면) 하나님을 찾을 시간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습니다. 25. 금식을 하므로 얻게 된 시간(식사 시간)에 하나님을 찾을 수 있고 금식을 하므로 얻은 물질로 선교사역을 도울 수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의무적으로 그렇게 하라고 말씀 드리는 게 아닙니다. 우리 교회는 명단을 만들어서 금식 지원자를 받지도 않습니다. 신약성경에 나온 그리스도인들의 실행은 자신을 부인했다는 것입니다. 음식물을 섭취하는 것은 생존에 필요한 일이지만 그것을 멈추고 그 시간에 하나님을 찾는 일을 했던 것입니다. 26. 단순히 음식물을 섭취하지 않고 음료를 마시지 않는 게 아니라 금식하는 사람의 마음이 주님을 향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6장을 보겠습니다. “또한 너희는 금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자기들의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들의 보상을 받았느니라. 오직 너는 금식할 때에 네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네 얼굴을 씻으라. 그리하여 네가 금식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이지 말고 은밀한 가운데 계시는 네 아버지께 보이라. 그리하면 은밀한 가운데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네게 드러나게 갚아 주시리라.”(마 6:16-18) 27. 하나님을 찾으려고 금식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금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가 금식한다는 것을 광고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의 수준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영적인 체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습니다. 그래서 금식을 할 때도 평소와 다름없이 세수를 하고 몸을 단장하는 것입니다. 금식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영적이라고 드러내기 위해 하는 게 아니라 육신을 위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향하기 위해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8. 이제 이사야 58장을 보겠습니다.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금식하였으되 어찌하여 주께서 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가 우리 혼을 괴롭게 하였으되 어찌하여 주께서 알아주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는도다. 보라, 너희의 금식하는 날에 너희가 쾌락을 찾으며 너희를 위하여 모든 수고를 강요하는도다. 보라, 너희가 금식함은 다툼과 논쟁을 위함이요, 사악한 주먹으로 치기 위함이니 너희는 너희 목소리가 높은 곳에서 들리게 하려고 이 날에 하는 것 같이 금식하지 말지니라. 그것이 내가 택한 그런 금식이냐? 그것이 사람이 자기 혼을 괴롭게 하는 날이냐? 그것이 갈대같이 자기 머리를 숙이고 자기 밑에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이냐? 너는 이것을 금식이라 하며 주께서 받으시는 날이라 하겠느냐? 내가 택한 금식은 이것이 아니냐? 곧 사악함의 결박을 풀어 주고 무거운 짐을 벗겨 주며 학대당한 자를 놓아주어 자유로이 가게 함으로 너희가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냐? 또 그것은 주린 자들에게 네 빵을 나누어 주며 내쫓긴 가난한 자들을 네가 네 집에 들이는 것이 아니냐? 또 네가 벌거벗은 자를 볼 때에 그에게 입히며 또 네가 네 살붙이를 피하여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냐?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같이 터져 나오고 네 건강이 신속히 솟구치며 네 의가 네 앞에서 가고 주의 영광이 네 후위대가 되리니 그때에 네가 부르면 주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으면 그가 이르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만일 네가 네 한가운데서 멍에와 손가락질하는 것과 헛되이 말하는 것을 없애고 네 혼을 이끌어 굶주린 자를 향하게 하며 고난당하는 혼을 만족시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올라 네 어둠이 대낮같이 되리라.”(사 58:3-10) 29. 우리는 믿는 사람들에게 침례를 줍니다. 만일 누군가 침례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한다면 그는 헛수고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의롭게 될 수 있습니다. 침례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얼마나 놀라운 일을 해 주셨는지에 대한 간증일 뿐입니다. 30. 금식도 이와 같습니다. 금식을 통해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되려고 한다면 그것은 마귀에게 속은 것입니다. 그러나 의로운 삶을 살고 금식을 한다면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금식을 한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는 게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은 금식을 통해 의로워지려고 했다가 주님께 책망만 들었습니다. 회당에서 모이고 헌금을 드리고 금식을 했지만 그들의 마음은 여전히 악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지 않았습니다. 31. 주님께서는 그러한 금식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관심을 두시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살며 온 마음과 힘과 생각을 다하여 주님께 나아오는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그럴듯한 종교적인 행위를 한다해도 하나님 앞에서 마음이 바르지 않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따라서 먼저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행하고 나서 금식을 해야 주님께서 기도에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금식은 쇼가 아닙니다. 금식하는 사람의 마음이 어떠한지가 중요합니다. 바른 마음을 갖는 게 중요합니다. 32. 이제 금식을 해야 하는 10가지 성경적 이유를 빠르게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시편 35편을 보겠습니다. “나로 말하건대 그들이 병들었을 때에 내가 굵은 베로 내 옷을 삼고 금식하며 내 혼을 겸허히 낮추었더니 내 기도가 바로 내 품에 돌아왔나이다.”(시 35:13) 33. 시편 기자는 금식을 하며 자신의 혼을 겸허히 낮추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자만심의 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마음 깊은 곳에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이 제일이라는 의식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인생은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본성입니다. 34. 그러나 잠시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우주를 주관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아닙니다. 죽은 동물과 채소 쪼가리를 입 속에 넣지 않으면 살아있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식료품점에 가서 캔 속에 들어있는 것이나 라면 봉지 안에 있는 것이라도 입 속으로 넣지 않으면 결국 죽어버리는 존재일 뿐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겸손해야 하는 충분한 이유가 됩니다. 35. 자신이 능력 있고 강한 존재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착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침에 하나님께서 깨워주지 않으신다면 영원한 잠을 자는 게 인간입니다. 몇 일만 식사를 걸러도 모든 기력을 상실하는 게 인간입니다. 금식하며 자신의 혼을 겸허히 낮추었다는 것은 자신의 본연의 위치를 찾았다는 것입니다. 36. 시편 69편을 보겠습니다. “내가 울며 금식으로 내 혼을 징계할 때에 그것이 내게 모욕거리가 되었고”(시 69:10) 37. 금식을 하는 성경적 둘째 이유는 금식이 혼을 징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심에 감사 드립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들을 자백하면 그분께서는 신실하시고 의로우사 우리의 죄들을 용서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느니라.”(요일 1:9) 38. 문제는 우리가 죄를 짓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한 후에도 동일한 죄를 다시 범한다는 것입니다. 동일한 죄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그저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기 보다는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자신을 부인하는 게 필요합니다. 금식은 더 이상 육신을 만족시키며 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금식을 통해 자신의 혼을 스스로 판단하며 징계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같은 죄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스스로에게 내리는 징계인 것입니다. 아이들이 잘못을 했을 때 부모는 반성하라는 의미에서 식사를 주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금식도 바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배에서 빨리 음식을 넣으라고 하지만 그것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육신이 원하는 것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을 추구하겠다는 것입니다. 39. 금식은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식사대신 금식을 한다면 우리는 열렬히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배가 고플 때마다 식사 대신 금식을 하면 우리의 기도생활은 풍성해 질 것입니다. 우리는 식사하는 것은 잊지 않으면서 기도하는 것을 잊고 살 때가 있습니다. 금식은 식사 대신 기도하는 것입니다. 위에서 신호를 보낼 때마다 식사를 하지 않고 기도를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충분한 교제를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뇌에서 밥을 먹으라는 신호를 보낼 때마다, “나는 오늘 식사를 하지 않겠다. 왜냐하면 내 혼이 주님께 반역하여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내 마음이 주님 앞에서 온전해 질 때까지 육신의 필요를 채우지 않겠다.”라고 하는 게 바로 금식입니다. 40. 우리는 죄를 짓기 원치 않는다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바르고 깨끗한 삶을 살기 원한다고 합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우리가 죄를 지을 때에는 실제적인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시편 기자는 자신이 죄를 지으면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스스로를 판단하며 징계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주님 앞에서 자신을 부인했던 것입니다. 금식은 혼을 징계하는 것입니다. 41. 금식은 혼을 겸손하게 하는 것이며 징계하는 것입니다. 육신은 문제를 일으킵니다. 육신은 죄를 짓는 데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합니다. 이제 시편 109편을 보겠습니다. “내 무릎은 금식으로 인해 쇠약하며 내 살은 기름기가 없나이다.”(시 109:24) 42. 금식은 여러분의 육신을 약하게 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원수는 누구인지 아십니까? 바로 여러분의 육신입니다. 육신을 이기는 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육신에게 먹이를 주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육신이 계속 승리를 거둔다면 육신에게 더 이상 군량미를 공급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금식은 육신의 힘을 약화시키는 것입니다. 43. 욥기 23장을 보겠습니다. “내가 그분의 입술의 명령에서 돌이키지 아니하고 내게 필요한 음식보다 그분의 입의 말씀들을 더 귀히 여겼도다.”(욥 23:12) 저는 이 구절을 붙여놓기에 가장 적당한 곳은 냉장고라고 생각합니다. 제 아내는 이 구절을 냉장고에 붙여놨습니다. 44.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에게 필요한 음식보다 더 귀하게 여겼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주님의 말씀을 간식보다 더 귀하게 여겼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과자보다 더 귀하게 여겼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디저트보다 더 귀하게 여겼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필요한 음식보다 더 귀하게 여겼다고 했습니다. 필요한 음식이라는 것은 생존에 필요한 음식이라는 것입니다. 45. 제가 만일 여러분에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분은 손을 들어 보라.”고 한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요? 아마 대부분 손을 들 것입니다. 우리는 음식을 먹는데 하루에 세 시간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는 데는 몇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까? 46. 욥은 필요한 음식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귀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한 시간 동안 뷔페에서 식사하는 것과 한 시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 중 선택하라고 하면 지체 없이 성경을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금식을 통해 무엇을 알 수 있는지 아십니까? 금식을 통해 여러분이 무엇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지 드러나게 됩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영에 속한 사람을 먹이기 보다는 육신에 속한 사람을 먹이는데 더 큰 관심을 보이는 게 현실입니다. 자신이 음식과 하나님의 말씀 중 어느 것을 더 사랑하는지 궁금한 사람들은 금식을 해 보면 그 답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47. 전도서는 해 아래의 삶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을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전도서 6장을 보겠습니다. “사람의 모든 수고는 그의 입을 위한 것이나 식욕은 채울 수 없느니라.”(전 6:7) 48. 사람이 일하는 이유는 먹고 살기 위해서입니다. 한달 동안 열심히 일한 이유가 입에 음식물을 채우기 위해서 라는 것입니다. 만일 일하지 않고도 먹고 살수 있다면 아무도 일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은 사람의 모든 수고는 그의 입을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인생이 끝났을 때 우리가 단지 입을 위해서만 산 것은 아니라는 게 드러난다는 사실이 큰 복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49. 우리는 단지 먹기 위해 사는 게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그것보다 더 크고 본질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단지 먹기 위해 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추구하기 위해 식사를 거를 수도 있습니다. 일주일에 한번씩 식사를 하지 않고 그 돈을 선교사역에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우리가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서게 되었을 때 주님께로부터 “너는 입을 위해서만 살지는 않았구나. 너는 음식보다 더 고귀한 것을 위해 살았구나” 라는 말을 들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입을 위해 삽니다. 그러나 저는 더 소중한 것을 위해 살기 원합니다. 50. 다시 이사야 58장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내가 택한 금식은 이것이 아니냐? 곧 사악함의 결박을 풀어 주고 무거운 짐을 벗겨 주며 학대당한 자를 놓아주어 자유로이 가게 함으로 너희가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냐?”(사 58:6) 51. 금식을 하는 여섯 째 성경적 이유는 죄를 그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금식을 하는 이유는 사악함의 결박을 풀고 죄를 그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식욕을 이겨낼 수 있다면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생존에 필요한 음식을 거부하므로 육신을 부인할 수 있다면 다른 모든 점에 있어서도 육신을 부인할 수 있습니다. 52. “또 그것은 주린 자들에게 네 빵을 나누어 주며 내쫓긴 가난한 자들을 네가 네 집에 들이는 것이 아니냐? 또 네가 벌거벗은 자를 볼 때에 그에게 입히며 또 네가 네 살붙이를 피하여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냐?”(7절) 금식을 통해 여러분은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금식을 하면 여러분이 소유하고 있는 것을 가지고 있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는 계기를 가질 수 있습니다. 53. 제3 세계에는 굶주리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수없이 많은 날을 굶주리다가 하늘나라에 가는 구원받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왜 그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지 아십니까? 우리는 그들처럼 굶주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겪는 고통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뉴스를 통해 굶주리는 사람들의 소식을 듣고 안타까워하기는 하지만 그게 다일 뿐입니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이나 고통 받는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습니다. 우리는 먹고 살기 바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기독교입니다. 54. 금식을 하므로 굶주리고 고난 받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제때 식사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의 냉장고에 먹을 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외식하고 싶을 때마다 외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굶주리고 있고 내일도 역시 아무것도 먹지 못하게 될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금식을 하므로 그들에 대해 생각하고 그들의 고통을 알게 될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55. 이제 신약성경에서 나머지 세 구절을 찾아보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마태복음 17장을 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종류는 기도와 금식을 통하지 않고는 나가지 아니하느니라, 하시니라.”(마 17:21) 56. 이 구절은 금식을 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에 대해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기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전쟁에서 패배했을 때 금식과 기도를 하고 나가 승리하는 것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만이라는 악한 사람에 의해 멸망 당하려 할 때도 에스더와 모르드개가 금식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므로 백성이 구출되고 원수를 물리쳤습니다. 니느웨가 멸망하리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 느니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구하며 금식하고 기도하자 하나님께서는 그 도시를 벌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떤 사람에게서 마귀를 쫓아내려 했을 때, 주님께서는 기도와 금식이 아니고서는 그들이 마귀들을 쫓아낼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57. 우리는 어떤 문제를 놓고 간절히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한 가지 기도 제목을 놓고 오랜 세월 계속 기도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기도했는데도 아무런 응답을 받지 못하면 실망하고 낙심합니다. 저는 그런 사람들에게 그 문제를 놓고 금식하며 기도했는지 묻고 싶습니다. 계속해서 동일한 죄를 반복해서 짓고 괴로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그에게 금식하며 기도했는지 묻고 싶습니다. 계속 기도하고 말씀도 찾아보았지만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역시 그에게도 금식하며 기도해보았는지 묻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쫓아내고 마귀를 대적하기 위해서는 기도와 금식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58. 금식을 하는 아홉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빌립보서 3장을 보겠습니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한 적이 있고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너희에게 말하는 많은 사람들 곧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걷느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파멸이요 그들의 하나님은 그들의 배요 그들의 영광은 그들의 수치스러운 일에 있고 그들은 땅의 일들을 생각하느니라.)”(빌 3:18-19) 59. 이 세상의 것들만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섬기는 신은 자신들의 배입니다. 경배란 무엇인지 아십니까? 경배는 사모함입니다. 경배는 시간을 내어 교제를 나누는 것입니다. 경배는 자신의 것을 희생해 가며 드리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의 배를 섬기며 경배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배를 위해 시간을 보냅니다. 그들은 배를 위해 돈을 지불합니다. 그들은 배를 섬깁니다. 그들은 배가 내리는 명령에 순종합니다. 배가 바로 이 세상 사람들의 신입니다. 60. 성경은 그러한 사람들이 바로 원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원수라고 말씀하지는 않습니다. 성경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61. 여러분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는 지난 시간에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반복해서 세 번이나 기도하신 것을 살펴봤습니다. 십자가는 자기 부인을 극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뜻보다는 아버지의 뜻대로 순종하시겠다고 기도하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겠다고 하셨습니다. 62. 현대의 기독교인들이 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지셨던 것과 같은 십자가를 지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편안한 교회에 다니고 싶어하고 많은 수입을 올리고 싶어하고 병이 들면 항상 즉시 고침을 받기 원하고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친절하게 대하기 원합니다. 자신을 부인하고 지는 십자가 같은 것은 결코 원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부인하기는 결코 원하지 않습니다. 63. 사도 바울은 이 세상의 것들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는 사람들을 보기 원했습니다. 배를 섬기는 것을 그만두고 살아계시며 참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을 보기 원했습니다. 64. 우리는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스스로 돌아봐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주일 오전 예배가 끝나고 식사를 하지 않고 바로 두 시간 동안 기도회를 한다고 하면 대부분의 성도들이 집에 가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오전 예배 후에 교회에서 출장 뷔폐를 불렀다고 하면 출석률은 신기록을 세울 것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우리는 점심시간이 되기 전까지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지만 점심시간이 되면 내 배는 음식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금식은 우리가 배를 섬기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65. 마지막으로 마태복음 5장을 보겠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이기 때문이요(for they shall be filled).”(마 5:6) 바른 마음과 바른 방법과 바른 동기로 하는 금식은 의에 주리고 목마르도록 인도해 줍니다. 육신은 본능적으로 음식에 주리고 목말라합니다. 금식은 육신의 주림과 목마름이 아닌 의에 주림과 목마름으로 우리의 마음을 돌리는 계기를 만들어 줍니다. 여러분이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한다면 여러분은 채움을 받을 것입니다(shall be filled). 식탁 위에 풍성한 음식이 가득 있다 할지라도 여러분은 여전히 만족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한다면 주님께서는 여러분을 채워 주실 것입니다.

반복해서 하는 기도
본문내용

Sermons on Prayers James W. Knox 지음 / 이우진 옮김 제6장 반복해서 하는 기도 1. 우리는 기도에 대해 공부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반복하는 기도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계속 반복해서 같은 기도 제목을 놓고 기도해야 하는지 의문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오늘은 이러한 것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2. 마태복음 6장과 26장을 보겠습니다. 먼저 6장을 보겠습니다. “오직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교도들과 같이 헛된 반복의 말을 사용하지 말라. 그들은 자기들이 말을 많이 하여야 아버지께서 들으실 줄로 생각하느니라.”(마6:7) 3.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7에서 헛된 반복을 금지하셨습니다. 헛된 반복은 이교도들이나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교도들은 특정한 기도문을 열 번 외우는 것이 다섯 번 외우는 것보다 더 효과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같은 기도문을 백 번 외우는 것이 오십 번 외우는 것보다 더 응답 받을 확률을 높여 준다고 생각합니다. 4.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보면 단 한번이라도 헛된 말로 기도를 하면 그것은 헛된 기도라고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헛된 말로 이백 번을 기도해도 그것은 여전히 헛된 기도일 뿐입니다. 같은 내용을 여러 번 반복하는 게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헛된 말을 하는 것에 있습니다. 동일한 기도 제목을 놓고 수백 번 기도하는 게 문제가 아닙니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헛된 말을 계속 반복하는 게 문제입니다. 5. 이제 마태복음 26장을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 계신 장면이 나오는 본문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 너머에 가서 기도할 동안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시면서 비로소 슬퍼하시며 몹시 괴로워하시더라. 이에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혼이 심히 슬퍼 죽을 지경이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조금 멀리 가사 얼굴을 대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오 내 아버지여, 가능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는 제자들에게 오사 그들이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도대체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었느냐? 너희가 시험에 빠지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참으로 영은 원하되 육이 약하도다, 하시니라. 그분께서 다시 두 번째 나가사 기도하여 이르시되, 오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서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오셔서 보시니 그들이 다시 자더라. 이는 그들의 눈이 무거웠기 때문이더라. 또 그분께서 그들을 떠나 다시 나가사 세 번째 같은 말씀들로 기도하시고”(마 26:36-44) 6. 예수님께서는 기도할 때 헛된 반복을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6장에서 예수님께서는 같은 기도를 같은 말로 세 번이나 반복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도는 헛된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드리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그 어디에서도 기도를 반복해서 하는 것을 금지한 적이 없습니다. 헛된 말을 반복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진심으로 하는 기도라면 하루에 같은 기도를 백 번을 해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하는 기도가 아니라면 단 한번도 하지 마십시오. 반복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헛된 반복을 하는 게 문제입니다. 7. 만일 구원받지 않은 가족을 위해 그들이 구원받게 해 달라고 진심으로 하는 기도라면 십분 마다 한번씩 같은 내용을 기도해도 상관없습니다. 그러한 기도라면 하나님께 매달려 끊임없이 반복해서 구해도 전혀 상관없습니다. 반복해서 기도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아 놓는다면 몇 번을 반복하든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8. 기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구하는 것과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는 것이라면 말의 표현이 좀 부족하다고 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단순히 “하나님,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해 주십시오. 제발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해도 진심으로 그렇게 기도한다면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우리가 구하는 것이 바른 것이라면 낙심하지 말고 계속해서 구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7에서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말씀합니다. 9. 기도에 대한 본문 두 개를 더 찾아보겠습니다. 야고보서 5장과 열왕기상 18장을 보겠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사도 바울도 자신이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요청을 한 것을 보았습니다. 사도 바울도 낙담하거나 용기를 잃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형제들에게 자신이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도록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한 것입니다. 10. 먼저 야고보서 5장을 보겠습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같이 동일한 성정의 지배를 받은 사람이로되…”(약5:17) 엘리야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천사장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신적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그도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엘리야가 우리와 같은 동일한 성정의 지배를 받고 있는 사람이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정(passions)”이라는 것은 “시각을 통해 전달되는 느낌(feeling)”을 의미합니다. 엘리야가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제단을 사르며 자신의 기도가 응답되는 것을 봤을 때는 마음이 한없이 담대해 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사벨로부터 자신을 죽이겠다는 메시지를 받았을 때는 두려워하며 도망쳤고 숨어서 차라리 죽기를 바랬습니다. 11. 엘리야의 감정은 그가 보는 것으로 인해 좌우되었습니다. 오바댜가 왕궁에 거하며 타협하는 모습을 보였을 때에는 그를 책망했습니다. 엘리야는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처한 상황을 보게 되었을 때에는 낙심하여 자살을 생각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12. 엘리야의 생애를 공부하면 대부분 갈멜산에서 바알의 대언자들과의 대결과 회오리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간 것을 살펴봅니다. 그러나 그의 삶을 자세히 들여보다면 그도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간절히 기도하니…”(약5:17) 성경은 우리와 같은 사람인 엘리야가 기도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엘리야가 승리하는 장면을 보면 항상 그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가 낙심하고 실패할 때는 기도하는 장면이 나오지 않습니다. 13. 엘리야는 위대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자신을 주님께 내어드려 위대한 하나님을 위해 싸울 때에는 위대한 일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위해 싸우지 않을 때에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습니다. 14. 시몬 베드로는 물 위를 걸었습니다. 그는 기적을 행했습니다. 그가 복음을 선포했을 때 수천 명이 회심하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작은 소녀 앞에서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기도 했습니다. 오순절에 그는 다락방에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성령으로 충만하게 해 주셨고 그는 거리에서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베드로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위대하신 하나님을 신뢰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삶에 위대한 일이 일어나게 해 주셨습니다. 엘리야나 베드로는 모두 우리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육신이 아닌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서도 놀라운 일을 하실 것입니다. 15. 잠시 골로새서 3장을 보겠습니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인에게 매우 중요한 구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켜졌거든 위에 있는 그것들을 추구하라.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 계시느니라.”(골3:1) 여러분이 구원받았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일어난 것입니다. “위에 있는 것들에 너희의 애착을 두고 땅에 있는 것들에 두지 말라. 너희는 죽었고 너희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느니라.”(골3:2-3) 16. 열정[1](passion)이란 시각을 통해 전달되는 느낌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애착(affection)이란 외부와는 상관없이 자신의 내면에 있는 사랑입니다. 사람은 출장을 가서도 간음을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내에게 가지고 있는 것이 애착이 아니라 열정이었기 때문입니다.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을 향해 가지고 있는 마음이 애착이 아니라 단순한 열정이라면 언제든지 부정한 짓을 할 수 있습니다. 17. 성경은 위에 있는 것에 애착을 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애착을 두라는 것은 보이는 것에 흔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로 우리가 아내에게 애착을 둔다면 멀리 떨어져 있어도 함께 손잡고 있을 때와 동일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애착입니다. 18. 단순한 열정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열정으로 주님을 섬기려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에 와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설교를 들을 때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충만합니다. 그러나 예배가 끝나고 집에 돌아가서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맙니다. 열정의 대상이 하나님에서 스포츠와 TV 드라마로 옮겨가 버리고 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19. 그러나 하나님을 향해 애착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예배 시간뿐만 아니라 일상의 삶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삶을 통해 그것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을 향해 애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마음은 화요일 저녁이나 일요일 오전 11시나 동일합니다. 20. 모든 사람들은 열정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위에 있는 것에 애착을 두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전혀 느낄 수 없을 때에도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 같이 보이지 않을 때에도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모든 것이 엉망으로 돌아가는 것 같아도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기도가 응답 받는 것 같지 않아도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병원에서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불이 나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통사고를 당해도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우리가 위에 있는 것에 애착을 두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도 여전히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으며 전혀 요동하지 않게 됩니다. 21. 열정이 아닌 애착 위에 세운 가정이라야 지속 될 수 있습니다. 열정을 가지고는 결코 예수 그리스도와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열정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면 얼마 가지 않아 흥미를 잃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믿음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은 애착(affection)입니다. 22. 저는 예전에 아프리카에 있는 어떤 청년으로부터 편지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여러 명의 형제들과 함께 있는데 자신을 포함하여 모두 최근에 구원받았으며 저의 설교 테이프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에게는 영적인 목표가 있는데 그것은 앞으로 삼 년간 열심히 복음을 전해서 백만 명을 구원받게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23. 저는 그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들이 주위의 환경으로 인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잃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자신들이 목표했던 것을 이루지 못하면 이내 실망하고 열정이 모두 사라져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위에 있는 것에 애착을 두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위에 있는 것들은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은 변합니다. 우리가 처한 환경은 변합니다. 그러한 것을 바라보면 우리의 마음도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위에 있는 것에 애착을 둬야 합니다. 변하지 않는 것에 애착을 둬야 우리의 마음도 견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4. 다시 야고보서 5장으로 돌아와서 엘리야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겠습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같이 동일한 성정의 지배를 받은 사람이로되 비가 오지 않기를 그가 간절히 기도하니 삼 년 육 개월 동안이나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였고 그가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자기 열매를 내었느니라.”(약5:17-18) 25. 엘리야는 기도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가 기도하자 삼 년 육 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았고 다시 기도하자 비가 왔습니다. 물론 이것은 대환란에 대한 예언이기도 합니다. 대환난 때 엘리야가 돌아오면 이러한 일이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26. 엘리야는 죽은 아이가 다시 살아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의 기도에 응답하시기 위해 죽은 아이를 살려주셨습니다. 또한 엘리야는 하늘에서 불을 내려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정확히 그가 말한 대로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놀라운 일들을 겪고도 엘리야는 열정(passion)에 의해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일이 잘 되는 것을 보면 기뻐하고 잘 되지 못하는 것을 보면 낙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교훈을 주기 원하셨습니다. 그가 열정이 아닌 위에 있는 것에 대한 애착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셨습니다. 27. 야고보서는 엘리야의 행적을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지만 열왕기상에서는 좀 더 자세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엘리야가 아합에게 이르되, 왕은 올라가서 먹고 마시소서. 많은 빗소리가 있나이다, 하니”(왕상18:41) 28.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고 있다면 우리는 담대하게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구한다면 우리는 응답을 받으리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그가 비를 멈추어 달라고 기도하면 멈추어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비를 다시 내리게 해 달라고 기도할 때까지는 비를 내리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와 약속 위에 굳게 서서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29. 엘리야가 아합에게 한 모든 말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고 느끼지 못했고 아무런 증거도 없었지만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지해서 비가 올것이라는 사실을 말했던 것입니다. 계속해서 42절을 보겠습니다. “이에 아합이 먹고 마시러 올라가니라. 엘리야가 갈멜 산의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자기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자기 종에게 이르되, 이제 올라가서 바다 쪽을 바라보라, 하니 그가 올라가서 바라보고 이르되, 아무것도 없나이다, 하매 그가 이르되, 일곱 번 다시 가라, 하니”(42-43절) 30. 우리는 엘리야의 삶을 통해 큰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특히 엘리야가 기도하고 응답 받는 것을 통해 중요한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약속을 받았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에 근거해서 아합에게 담대하게 진리를 선포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는 믿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기도에 응답해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 31. 그러나 하나님의 응답은 없는 듯 했습니다. 엘리야는 아무것도 응답 받지 못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비를 구했지만 구름 한 점 없었습니다. 만일 이때도 엘리야가 열정으로만 사는 사람이었다면 그는 꿇었던 무릎을 다시 펴고 일어나 산을 내려와서 아합에게 사과하고 하나님을 떠나버렸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듣지 않으셨고 응답하지 않으셨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열정으로만 일했다면 거기서 모든 걸 멈췄을 것입니다. 32.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교회에 다니고 봉사도 하고 헌금도 하는데 왜 자신들의 기도가 응답 받지 못하는지 의아해 합니다. 왜 남편을 구원해 주지 않으시고 아내를 구원해 주지 않으시고 병을 고쳐주지 않으시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열정에만 의지하여 신앙생활을 한다면 곧 그만두고 말 것입니다. 33. 43절의 뒷부분을 주목해 보십시오. “일곱 번 다시 가라.”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십니까? 다시 무릎을 꿇고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헛된 반복을 하라는 게 아니라 진심을 담아 열심히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러한 기도가 효과적인 기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쏟아 부어야 합니다. 34. 엘리야의 종이 일곱 번째 가기 전에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을 것입니다. 두 번째 세 번째 갔을 때에는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엘리야는 거듭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께 호소했을 것입니다. 아마 이런 일이 서너 번 반복되었을 쯤에는 엘리야의 종은 이미 지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이제는 아무리 기도해봐야 비가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늘은 여전히 구름 한 점 없이 맑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여섯 번이나 간절하게 기도했지만 응답이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35. 만일 엘리야가 눈에 보이는 것이나 느낌으로만 주님을 섬겼다면 여섯 번이나 기도했지만 아무런 응답을 받지 못한 시점에서 매우 낙심했을 것입니다. 그는 확신을 거의 잃어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섯 번이나 엘리야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심으로 그의 열정과 느낌과 감정을 모두 사라지게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하늘에 있는 것들에 애착을 갖게 하셨습니다. 그가 여섯 번이나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면서도 아무런 응답을 받지 못했을 때 그는 점점 느낌과 감정을 신뢰하는 것으로부터 하늘에 애착을 갖는 것으로 바뀌었을 것입니다. 36.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에 의지해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눈물로 씨를 뿌리면 기쁨으로 거두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눈물을 씨를 뿌려도 아무것도 거두지 못하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섯 번이나 눈물로 씨를 뿌렸지만 매번 아무것도 거두지 못하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기도와 섬김과 생활에서 이러한 일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구했는데도 아무런 응답조차 없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구름 한 점 없고 바람도 없고 비도 없고 응답도 전혀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가 느낌이나 감정을 신뢰하지 말고 우리의 애착을 하늘에 두게 하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37. 엘리야는 주변 상황에 당황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의 애착은 하늘에 있었습니다. 자신의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로 인해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이루시리라고 믿었고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는 기도는 반드시 응답 받으리라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여섯 번이나 응답 받지 못했지만 일곱 번째 기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엘리야의 애착은 구름이나 바람이나 비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의 애착은 하나님께 있었고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약속을 지키시리라는 사실을 믿고 있었습니다. 38. 44절을 보겠습니다. “일곱 번째 이르러서는 그가 이르되, 보소서, 바다에서 사람의 손만 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나이다, 하매 그가 이르되, 올라가서 아합에게 말하기를, 비에 막히지 아니하도록 왕의 병거를 준비하고 내려가소서, 하라, 하니라.” 39.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의 대언자들을 물리쳤습니다. 아합의 생각에 엘리야는 하나님의 대언자였습니다. 엘리야는 아합에게 큰 비가 있으니 피하라고 경고했습니다. 만일 그가 처음 기도가 응답 받지 못했을 때 계속 기도하는 것을 멈췄다면 아무런 비도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아합도 엘리야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첫 번째 기도가 응답 받지 못했다고 해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악한 왕이라고 평가 받는 아합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40. 엘리야는 비가 올 때까지 기도했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간증이 모두 자신의 기도에 달렸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엘리야가 계속 반복해서 기도하지 않았다면 그는 아합에게 간증을 잃었을 것입니다. 41. “그 동안에 구름과 바람으로 인해 하늘이 캄캄해지고 큰 비가 내리므로 아합이 병거를 타고 예스르엘로 갔는데”(45절) 왜 큰 비가 내렸는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큰 비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왜 큰 비가 내렸는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믿고 열렬하게 기도하는 사람의 기도에 응답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아무런 응답이 없을 것 같고 아무런 가망이 보이지 않을 때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기도하는 사람에게 주님께서 응답해 주셨기 때문에 큰 비가 내린 것입니다. 엘리야는 주변 상황에 개의치 않고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에 거했습니다. 42. 동일한 기도를 일곱 번 반복한 것이 잘못이었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믿고 하는 기도라면 응답이 없는 것 같다고 해서 기도를 그만두는 것이 잘못하는 것입니다. 43. 우리는 구원받지 못한 우리 가족과 친구들과 이웃들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영적 성장을 위해 계속 반복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간증을 지킬 수 있게 해 달라고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아직 충분하게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교회가 주님을 바르게 섬길 수 있게 해 달라고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다른 곳에서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단지 기도하고 싶을 때만 기도하는 게 아니라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44. 성경은 “이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히11: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엘리야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는 하늘이 맑고 구름 한 점 없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큰 비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큰 비가 올 것을 믿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을만한 아무런 이유가 없을 때에도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45. 우리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훈련이 된 제자들이 필요합니다. 믿음을 가지고 끊임없이 간절하게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아무런 응답을 받지 못할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도 전혀 낙담하지 않고 믿음을 갖고 꾸준히 기도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46. 우리는 이 마을에서 지속적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전도지를 나눠주었고 거리에서 설교를 했고 방송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오랜 시간 지속했지만 구원받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도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도 변화 받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한없이 멀리 떨어져 계신 것처럼 보였습니다. 47.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싶다고 하며 찾아오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단순히 열정으로만 사역을 했다면 우리는 진작에 그만 두었을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러 나가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러 나가기 전에 먼저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들의 마음과 삶을 온전히 주님께 드렸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사역할 수 있었습니다. 열정으로만 신앙생활을 하려고 한다면 머지 않아 지쳐 쓰러지고 그만두게 될 것입니다. 오직 하늘에 애착을 두어야만 주위 상황에 흔들리지 않고 아무런 응답이 없는 것처럼 보여도 요동치 않고 주님을 섬기고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48. 우리에게 무엇을 필요한지 아십니까? 엘리야처럼 기도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비가 오든 오지 않든,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든 떨어지지 않든, 누가 방해하든 그렇지 않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마음이 있다면 주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도 실망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것입니다. 49. 우리가 느낌과 감정의 영역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힘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느낌과 감정이 아닌 하늘에 있는 것에 애착을 두고 확신 가운데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행하시겠다고 약속하셨는지 아시기 바랍니다. 50. 성경은 데살로니가전서 5:17에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혹시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것을 여섯 번이나 간절히 기도했는데 응답 받지 못한 분이 있습니까? 그것이 정말 성경에서 약속하신 것이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기도라면 계속 기도하십시오. 일곱 번째에는 응답해 주실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를 스무 번이나 했지만 응답 받지 못한 분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계속 기도하십시오. 스물 한번째는 응답해 주실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51. 이 세상에서는 모든 것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 그러한 일이 생기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나 분명 주님께서는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를 위해 우리의 생각과는 다른 어떤 일을 행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의 영적 성장을 위해 바로 응답해 주지 않으시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우리가 구하는 것이 바른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시각에서는 그 기도에 응답해 주지 않으시는 것이 더 좋은 경우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52.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것보다 응답해 주지 않으시는 것이 우리에게 더 유익하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지 않으실 것입니다. 지금 응답해 주시는 것보다 나중에 응답해 주시는 것이 우리에게 더 유익하다면 하나님께서는 나중에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열정의 끝은 낙심입니다. 그러나 하늘에 애착을 두는 사람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모두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이라는 사실을 믿고 안식합니다. 53.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늘에 계신 분께 애착을 두는 것입니다. 모든 남편은 아내에게 애착을 두어야 하고 모든 아내는 남편에게 애착을 두어야 하며 모든 자녀들은 부모에게 애착을 두어야 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애착을 두어야 합니다. [1] 우리말 성경에서는 이것이 “성정”이라고 번역되었습니다.-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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